일본에서 텔레비전을 켜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 하나이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텔레비전 속 사람들은 일본과 전세계 곳곳을 누비며 맛있게 먹고, 싸게(또는 비싸게) 먹고, 많이 먹고, 또 먹는다.
전형적인 요리교실이나 한국의 '식신원정대' 같은 음식 소개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다. 와이드쇼와 같은 정보 프로그램, 모든 시간대의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언제나 온갖 음식으로 넘쳐난다. 올 초 4년간의 독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인 친구는 아직도 이 구루메('미식가'를 뜻하는 불어 gourmet의 일본식 발음) 프로그램으로 도배된 방송에 적응이 안 된다며 투덜거린다.
물론 '요리방송'이라는 장르는 갑작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1978년의 <방송문화>(4월호)는 당시의 요리방송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놓고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가르쳐 주는 '강좌형 요리방송', 쉽게 먹어볼 수 없는 요리를 대신 체험해 소개하거나 연예인들이 직접 요리 실력을 뽐내는 '오락형 요리방송', 스폰서를 위주로 음식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재료중심형 요리방송'이 그것이다. 1953년 텔레비전 방송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요리방송은 1970년대에 이미 다양한 형태로 전파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요리방송의 계보를 이해하고 나서도, 매일매일 펼쳐지는 황홀한 '맛의 세계'를 즐기고 있자니 한 편으로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채운다. 글로벌 경제위기에 국내 경제가 휘청거리고, 비정규직 등 고용문제가 한계에 다다르고, 지방도시들의 재정적자가 고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왜 일본의 텔레비전은 변함없이 풍요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가. 왜 일본인들은 그 풍요로움에 익숙한가. 그 풍요로움은 어디에서 왔는가.
▲ 일본 <후지TV>의 요리 프로그램 촬영 장면 |
일본의 많은 학자들은 전후 일본사회의 전환기 중 하나로 1960년대 고도성장기를 주목한다. 냉전 동맹국인 미국의 확고한 보호와 지원 속에서 한국전쟁의 특수를 누리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경험하기 시작한 일본사회는 1960년대 들어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생활보수'였다.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시민들의 마지막 가두 데모로 기록되는 1960년 '안보투쟁'(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운동) 직후 일본사회를 지배한 키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득배증(所得倍增)"이었다. 당시 안보투쟁에 의해 물러난 기시(岸) 총리의 뒤를 이은 이케다(池田) 정권이 내세운 '국민소득배증' 정책이 절묘하게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실 국민의 소득을 갑절로 늘려주겠다는 이 정책이 실제로 국민들의 소득을 두 배로 늘려주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 10%가 넘는 고도경제성장 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에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 정책이 성공하면서 국가에 대한 '정치적 대항'은 '경제적 문제'의 틀 속으로 급속도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근대화 우선'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일어나면서 보수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업과 노동자가 일체화되는 기업문화, 그 기업들을 모세혈관처럼 끝없이 잇는 하청구조가 형성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통해 탄생한 자민당이 '55년 체제'(1955년 자민당이 탄생한 이후 1993년까지 지속된 정치 체제)라는 굳건한 정치권력 구조를 구축한 가운데 일본인들의 일생생활은 급변했다.
도쿄올림픽이 개최되고, 컬러텔레비전이 급속도로 보급되고, 곳곳에 뉴타운이 지어지고, 중산층 계급이 생겨났으며, 노동자들까지도 '생활보수'를 외쳤다. 그들에게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정치의 현실에 지배당하며 격동의 시대를 경험하는 동안 이렇게 일본만은 정반대로 '탈정치-경제'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급성장한 미디어의 지배가 시작되었고 문화는 철저하게 상업화·소비재화되어 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백화점과 슈퍼마켓으로 상징되는 경제적 풍요로움이었고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오락방송과 드라마 속 세계였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은 거실이 딸린 주택, 최신 유행의 옷과 함께 바로 그 텔레비전 속 세계의 풍요로움을 재현하는 욕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산소호흡기로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해 온 '자민당의 시대'가 이제 결국 숨을 거두려고 하고 있다. 자살자 수는 11년째 연 3만 명을 넘었고, 올해 상반기에 도산한 회사만 해도 8169건이 넘는다고 한다.
아무도 일본사회의 안정된 시스템을 쉽게 의심하지는 않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일본의 텔레비전은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언제나 맛있는 요리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텔레비전은 앞으로도 계속 일본인들이 보고 싶어하는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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