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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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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고개

[한윤수의 '오랑캐꽃']<93>

"한 고개 넘어서 두 고개 넘어서 세 고개 넘어서,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아이들이 여우를 만나려면 세 고개를 넘듯이, 외국인들도 돈을 받으려면 보통 세 고개를 넘는다. 그들이 넘는 세 고개를 단계별로 살펴보겠다.

한 고개는 한국인 <보호자>를 만나는 단계이다. 외국인 혼자서 돈을 받기란 무지하게 어렵다. 그래서 자신을 도와줄 한국인 보호자를 만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도와주는 보호자냐? 아니면 도와주는 척만 하는 보호자냐?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돈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거의 결판난다. 보호자를 잘 만나면 이 한 고개에서 돈을 받을 수도 있다.

두 고개는 노동부에 <출석>하는 단계이다. 노동부에서 출석요구서가 오면 노동자는 반드시 자기 발로 노동부까지 가야 한다. 자신이 가지 않는 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노동부에 출석하지 않아서 돈을 못 받는 노동자도 굉장히 많다.

세 고개는 감독관 앞에서 사장님과 싸우는 단계이다. <싸울> 줄 모르면 돈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대부분 겁에 질려 있으므로 한국인 보호자가 대신 싸워주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면 실제로 노동자들이 세 고개를 어떻게 넘는지 태국인 지라왓의 예를 보자.

1. 한 고개 (일명 보호자 고개)

청주에 있는 지라왓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발안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걱정 말고 발안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친구의 안내를 받아 우리 센터로 와서 S실장과 상담했다. S실장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보호자가 되어 도와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지라왓은 비로소 안심했다.

2. 두 고개 (일명 출석 고개)

지라왓이 있는 청주에서 대전 노동부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정상적인 경우라면 30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야근이 끝난 시점인 오전 6시 30분에 청주를 출발해서 12시 15분에 대전 노동부에 도착했으니 무려 5시간 45분이 걸렸다.

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 청주에서 대전으로 직접 가지 않고 발안을 거쳤기 때문이다. 왜 발안을 거치냐고? 그는 길 못 찾기로 유명한 태국인으로 혼자서 대전 노동부까지 찾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오로지 길치이기 때문에 발안을 거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보호자와 같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국인은 친구나 보호자 없이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지라왓은 발안에 와서 우리 센터의 S실장과 태국인 통역의 손을 잡고서야 비로소 대전을 향하여 똑바로 내려갔다.

3. 세 고개 (일명 싸울 고개)

지라왓은 1년 만기를 다 채우고 퇴사했다. 그러나 사장님은 만기 이틀 전에 퇴사했다고 주장하며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감독관 앞에서 S실장이 물었다.
"지라왓이 21일까지 근무한 거 맞죠?"
사장님이 대답했다.
"분명히 난 19일날 나가라고 했으니까 그 이후 근무한 건 모릅니다."
"지라왓은 관리자의 지시를 받아 일했다는데요.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여간 난 모릅니다."
"관리자가 사장님 지시를 받지, 사장님이 관리자 지시를 받습니까? 말이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논리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사장님은 엉뚱한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여자가 와가지구 외국인 센터를 대변한다구 큰소리네!"
S실장이 기가 막혀 쏘아주었다.
"이 상황에서 여자 남자를 왜 구분합니까? 사안하고 상관없는 얘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사장님을 낳은 어머님도 여자 아니에요? 여성 폄하 발언 하지 마세요."
"이 아줌마가!"
"아줌마라니, 말씀 좀 점잖게 하시죠!"
사장님은 분해서 씩씩거리다가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가 담배를 태우고 20분쯤 후 다시 들어올 때, S실장이 악수를 청했다.
"개인감정이 개재된 게 아니니까 순리대로 풀어갑시다. 지급할 것 지급하시고요."
사장님은 마지못해 슬그머니 손을 잡았지만 감독관은 감탄해마지 않았다.
"실장님, 여걸이시네요. 먼저 악수를 청하시고."
결국 사장님은 *59만 1560원을 두 차례에 걸쳐 지급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가시 돋친 발언만은 계속했다.

"아줌마, 개인사업 해보셨어요?"
"예, 했는데 망했어요."
"아줌마, 직원들 임금 안 주셨죠? 꼭 그랬을 거 같아."
"왜 이러십니까? 저는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태국인 통역은 무서워 벌벌 떨었지만, 지라왓은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독관이
"너 때문에 싸우는데 왜 웃어?"
하고 야단을 치고는 사장님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사장님, 인격 모독하는 발언 삼가 해주세요.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실장님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그제서야 사장님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으로 마지막 고개를 넘었다.

세 고개를 넘고 발안으로 돌아오는 길.
비로소 입이 열린 태국인 통역이 고백했다.
"선생님들, 이렇게 고생하시는 줄 몰랐어요."

*59만원 1560원 : 이 돈을 받기 위하여 기름값 5만원을 쓰고 세 사람이 동원되었으니 참으로 비효율적인 출장이다. 하지만 효율만 따진다면 억울한 일을 풀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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