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금융위기 이후, 중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사는 한국인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지역 한국인들의 약 20% 정도가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은 주로 개인 사업가, 기업 주재원과 가족 그리고 유학생들이었다. 환율 격차가 기존의 두 배로 벌어지자, 현지에 남은 자들의 생활도 크게 변했다. 외식과 교통비를 줄이고 집에서 요리를 해먹고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한국인이 늘어났다. 다가온 경제적 위기는 한중 수교 17년 이래로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해온 중국 내 한국인의 위상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베이징 왕징의 코리안 네트워크
베이징에는 약 12만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유학생이 주로 거주하는 우다오커우(五道口)와 회사 주재원과 유학생이 함께 거주하는 왕징(望京)으로 크게 나뉜다. 이 두 지역은 거주 목적에서 그 위상이 갈린다. 우다오커우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정거장 같은 곳이라면, 왕징은 2000년대 초부터 점차 영구 정착촌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왕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왕징에는 약 23만 명의 거주자가 살고 있다. 이 중에서 한국인은 약 8만 명을 차지한다. 이 중 한국인 집단 거주 아파트 단지 내의 한국인 비율은 무려 70%에 육박한다. 이밖에 왕징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10만 여명의 거대한 한 군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바로 조선족 동포들이다. 이들은 왕징 외곽에 거주하면서 거의 매일 왕징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왕징을 터전으로 거주하고 생활하는 20만의 한국인과 조선족 두 집단은 긴밀한 코리안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본래 왕징(望京)을 국제 도시(International City)로 건립하기 위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수차례 공청회를 열고 전문적으로 준비했다. 왕징에는 이미 대형 쇼핑몰이 즐비하고 다국적 기업의 대규모 연구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최첨단 아파트 단지가 차근차근 완공되었다. 그러나 왕징은 중국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다양성이 골고루 분포된 국제화된 도시로 변모하기보다는, 외국인 중에서 유달리 코리안 네트워크가 부상하여 현지 중국인과 더불어 이 지역의 다수 집단(Majority)이 되었다.
왕징의 다중 문화 충돌
왕징 지역 내에서 한국인들은 다수 집단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문화정체성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그들 특유의 생활방식과 문화공간을 마음껏 넓혀나갔다. 중국 정부는 이를 '국제화'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통제보다는 자율의 측면에서 개방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이웃 집단들과 적지 않은 문화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충돌은 크게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발생했고, 그 양상은 사업 현장, 거주 현장, 교육 현장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분출됐다.
중국인들은 한국인의 일방적인 문화 행태를 문제 삼았다. 한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왕징에서 다수 집단을 형성했으면서도 정작 생활면에서는 중국인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한국인 공동체는 날로 견고해졌지만 이를 통한 한-중 교류는 심화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주택지역 고성방가, 심야의 실내 소음, 끼리끼리 문화양태, 과소비에 의한 물가상승, 공공의식의 결여와 배타적 행위표출 등을 주된 불만으로 거론했다. 이로 인해 한류로 하나씩 쌓아 놓은 이미지가 실제 교류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족들은 입장이 달랐다. 한족과는 달리 공통분모를 많이 소유한 이들은 한국인의 업신여김과 하대 행위에 가장 큰 불만이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거주 공간, 기업 현장, 가게 현장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주로 피고용자의 입장에 있었던 조선족들은 핏줄과 문화가 한 뿌리임을 강조한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행태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러한 상처는 한국 땅에서 받는 상처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는 같은 디아스포라, 즉 신조선인과 구조선인이 중국이라는 이국 현장에서 융화하지 못한 데서 온 실망감이 함께 왔다.
공생과 협력을 위한 현지화의 모색
분석해 보면, 중국인과의 충돌은 민족과 문화가 다르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하였고, 조선족과의 충돌은 민족과 문화의 동질성과 차이가 공존하는 현장 속에서 발생하였다.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지니고 중국에서 태어난 2,3세가 대다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이들을 한민족의 기존 울타리 속으로 편입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한국어로 조선족의 조선말을 개정하려고 시도했다.
반면 중국인들과의 접촉에서는 무교류의 원칙을 고수하여 담을 쌓거나, 교류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활패턴이나 의식구조에 따른 간극을 좁히려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인 표출이나 상대에 대한 무시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한중 수교 이후 매년 500여만 명의 한국인과 중국인이 상호 왕래를 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의 정착촌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수 집단이 가져야 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상호 공존에 대한 설계가 매우 부족했다.
최근 들어 상호 존중과 상호 배려를 강조한 여러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겸따마다' 운동이다.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자'는 운동은 한국인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대상은 대부분 현지 중국인들에게 맞춰져 있다. 더 시급히 점검하고 수리해야 할 영역은 오히려 '코리안 네트워크'일 것이다. 때마침 터진 금융위기와 인민폐의 급격한 가치 상승은 한국인과 조선족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상하 관계로 설정되었던 오랜 전통이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다.
중국 내 코리안 네트워크 현장의 현지화는 결코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화 공급 위주의 경제 구조를 인민폐의 자급 능력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한국인의 중국 내 경쟁력은 쉽게 제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코리안 네트워크의 위상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접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상호 차이에 대한 인정, 동반자로서의 공감대 형성, 갈라져 나온 한민족 문화에 대한 공유 등을 전제로 하고, 이를 기반으로 폐쇄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광대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벨트를 모색해야 할 과제가 눈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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