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렇게 정리되어 나오는 대부분의 글에서 심각한 오류가 규칙적으로 발견된다. 북한의 핵물리학(원자력 연구)과 관련한 초기 역사에 대해 잘못 정리된 내용이 정사(正史)인 듯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에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혹은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가 기록된 대표적인 1차 사료(史料)인 '과학원 통보/학보'를 직접 학계에 소개한 사람으로서 북한의 핵물리학(원자력 연구)의 초기 역사를 제대로 밝히려 한다.
초기 북한 과학기술계 핵심은 월북 과학기술자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는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시기 형성된 과학기술자가 다른 분야에 비해 매우 적었기도 했고, 어렵게 길러진 과학기술자들도 대부분 해방 당시 남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최초의 과학기술 중앙연구소라 할 수 있는 '북조선중앙연구소'가 1947년 2월 설립되었다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흡수된 것도 연구기관을 이끌어갈 과학기술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 북한 영변의 핵 발전소 시설 ⓒ연합뉴스 |
부족한 과학기술자를 확보하기 위해 북한 지도부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교육기관을 만들어 새로운 인재를 직접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소련 등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길러진 과학기술자들은 실제 연구나 행정에 바로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활용가능한 인력, 즉 일제시기에 교육받은 과학기술자(북한에서는 이들을 '오랜 인텔리'라고 부른다)를 확보하기 위해 남한에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월북하도록 유도하였다. 1947년에 개교한 흥남공업대학은 두 정책이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는데 월북 과학기술자들에게 교수 직위와 연구 환경 보장 약속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과학기술자 확보를 위한 북한 지도부의 노력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인력부족으로 1947년에 실패로 끝난 중앙연구소 건설 시도가 1952년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의학, 농업과학 등 모든 학문 영역을 포괄한 북한 최고의 중추 연구기관인 '과학원'(오늘날은 '국가과학원', 당시에는 '과학 아카데미')이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1일에 개원되었다. 당시 과학원을 대표하는 학자들에게 '원사', '후보원사' 칭호를 부여하였는데 원사 10명 중 8명(80%)이 월북한 사람이었고 후보원사 15명 중 9명(60%)이 월북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최소 1960년대 초까지, 길게는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 과학기술계의 핵심 연구 인력으로 활동하였고 대부분의 성과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월북한 과학기술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리승기'였다. 그는 북한 과학기술계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시기 과학기술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는데 그는 그 중 한 명이었고, 그는 혼자 월북하지 않고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여 연구 집단 전체가, 혹은 연구시스템 전체가 남에서 북으로 이전된 드문 사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연구하여 개발한 '비날론'은 미국에서 개발한 '나일론'에 비견되는 합성섬유로서 북한은 1961년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 공장을 만들어 적극 활용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의 화학공업체계는 자체적으로 확보 가능한 석탄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다. 화학공업체계가 자립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제는 리승기의 이러한 유명세 때문에 북한의 핵물리학, 원자력 연구에서도 리승기가 핵심역할을 하였다고 분석하는 경향이다. 사실은 당시 월북한 과학기술자 중 물리학계 '원사' 칭호를 받은 '도상록'이 북한 물리학, 좁게는 핵물리학 혹은 원자력 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역시 월북할 때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물리학계 전체를 구성하였다. 게다가 그는 월북 직후 김일성과 면담을 통해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중앙 차원의 집중 지원을 약속받았고 이후 과학원 창립 당시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만큼 북한 과학기술계 형성에 핵심적인 일을 하였다.
북한 물리학의 아버지, 도상록
도상록은 1932년 동경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는 리승기와 달리 일제시기에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물리학계의 최첨단 분야인 양자역학(핵물리학의 기본)에 대한 실력은 출중하여 자신의 논문을 1940년에 영문으로 발행되던 '일본수학물리학회기사'에 게재하기도 하였다.("고유치 문제와 하이젠베르크의 불결정관계", "맥스웰의 방정식에 대하여", "전자기마당의 근본방정식에 대하여" 등이 그가 했던 강연 제목이었고 그가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헬륨수소분자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이었다.) 졸업 이후 그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40년 만주의 신경공업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해방되자마자 그는 서울로 들어와 경성제국대학을 경성대학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그는 흩어져 있던 물리학자들을 모아 경성대학 물리학과를 정상화시킴과 동시에 경성대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미 군정이 어렵게 운영되기 시작한 경성대학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비롯한 미 군정에 비판적이던 교수들을 배척하기 위해 서울 시내 여러 대학들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자 월북하였던 것이다. 당시 도상록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물리학계, 특히 핵물리학(원자력 연구) 분야를 이끌었던 사람은 한인석, 정근, 전평수, 려철기 등이었다.
월북 직후 도상록은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946년부터 시작된 유학생 파견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9월에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의 물리수학부 부장, 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력학", "량자력학", "원자에네르기와 그의 평화적 리용", "원자핵에 관한 보충 자료" 등 교재를 직접 쓰거나 번역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1952년에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꿈이었던 중앙 과학기술 연구소 설립을 위한 실무를 담당하여 '전국 과학자대회' 개최와 '과학원' 설립을 직접 추진하였다.
북한 최초의 핵관련 연구조직 :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 '핵물리연구실'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될 당시에는 핵관련 연구조직이 전혀 없었다. 과학원은 소련의 과학 아카데미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1952년 12월 개원 당시에는 8개의 연구소만 설치되었다. 과학연구활동과 기술지원활동을 구분하여 중앙 연구소에서는 이론적인 연구를 주로 담당하고 관련 부처(생산성) 산하 연구소에서는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 활동을 담당하던 소련 시스템에 따라 학문 분야별로 연구소가 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개원 직후 북한 지도부는 소련처럼 과학기술계의 역할 분담이 어렵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까지 중앙연구소(과학원)에서 담당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 과학원 산하에 '공학연구소'를 추가로 설립하였다. 이로써 과학원은 9개의 연구소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설립된 연구소 중에서 물리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가 설립되었는데 그 아래에는 3개의 연구실(수학연구실, 실험물리연구실, 이론물리연구실)만 만들어졌다. 북한 최초의 핵관련 연구조직인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 '핵물리연구실'은 1955년 12월 혹은 1956년 1월에 단행된 과학원 1차 조직개편 당시 만들어졌다. '과학원 통보'에는 1955년 4월경에 핵물리 관련 연구실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나와 있다. 이 당시 새로 생긴 '핵물리연구실'을 최근 언론에서는 '핵물리연구소'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이 당시 서둘러 '핵물리연구실'을 꾸린 것은 1956년 3월에 설립예정이던 '연합핵연구소(JOINT INSTITUTE for NUCLEAR RESEARCH)'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드브나에 세워진 '연합핵연구소JINR'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 12개가 멤버로 참가하여 꾸려진 핵물리(원자력) 연구소로 북한은 창립 멤버로 참가하였다. 북한 입장으로서는 이 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참가함으로써 핵물리(원자력)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959년에 발간된 과학원 통보에는 소련의 도움으로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 수 있었고 입자가속기의 일종인 '베타트론'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상록은 이러한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러한 활동을 높이 인정받아 도상록은 1973년에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6년에는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았다.
1958년 3월에 개최된 '제1차 당대표자회의'에서는 천리마운동 등으로 가속된 경제발전 속도에 맞추어 경제발전계획을 수정하면서 연구용 원자로, 베타트론 건설과 함께 '원자력 연구 중심'과 '동위원소 실험실'을 새롭게 설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61년에는 원자력 관련 중추 지도기관인 '원자력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62년에는 평북 영변과 박천에 '원자력연구소'가 세워졌으며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종합대학에도 핵관련 연구소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또한 당시 원자력 연구는 '평화적 이용'을 위한 것이라는 목적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동위원소 연구실' 설치가 의결되었던 것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1956년부터 구체적으로 진행된 북한과 소련 사이의 원자력 관련 사업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핵무기 제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공동 연구 차원의 것이었다. 북한도 소수지만 이미 훌륭한 핵물리학자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국제적 공동연구활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당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활용하는 것이다. 방사선을 이용하여 물질을 파괴하지 않은 상태로 조사할 수도 있고 동위원소를 이용한 원자 수준의 정밀한 추적 조사도 가능하여 연구 활용도가 많았다.
1956년부터 핵관련 활동에는 북한과 소련이 협력활동을 정상적으로 진행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국제 분업체계에 들어오라는 소련의 제안을 김일성이 거부하면서 빚어진 갈등은 1957년부터 계획된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에 소련이 반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56년 말에는 경제발전계획에 필수 조건이 강재 생산에 절대적인 지원을 소련이 거부함으로써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1956년 8월에 발생한 북한 역사상 최대의 종파사건에 대해 소련이 힘을 보태는 조치를 취해서 두 나라 지도부 사이는 더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소련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 관련 기술을 이전했을 리는 거의 없었다.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도 자체적으로 핵무기 제조 기술을 확보하였지만 북한으로의 기술이전에 대해서는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은 핵관련 기술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시작은 1960년대 초에 벌어진 쿠바사태였을 것이다. 미국에 대항하던 소련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북한지도부는 소련이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던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 강호제 박사가 운영하는 북한 과학기술사 관련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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