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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수의 '오랑캐꽃']<75>

태국여성 동바이는 퇴직금을 받아야 하는데 노동부에 출석은커녕 내 전화도 받지 않았다. 두 번이나 펑크를 내자 감독관은 할 수 없이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동바이가 센터에 다시 나타났다.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묻자 동바이는 뜻밖의 소리를 했다.
"무서워서요."
이 답답한 태국 사람아, 그러면 어떻게 돈을 받나?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돈 못 받아."
동바이는 낙심하여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 동바이를 살려주는 일이 일어났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동바이의 여동생 람야이와 미얀마 남성 씨투나인이 돈을 받아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도 동바이와 똑같은 케이스였다. 같은 회사에 같은 퇴직금 체불. 덕분에 동바이는 두 사람 뒤에 같이 묻어가게 되었다.
3 사람의 진정서를 한 장에 써서 노동부로 보냈다.

노동부에서 출석요구서가 날아가자 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불법체류자를 고용했으므로 자칫 잘못하면 돈은 돈대로 주고 벌금은 벌금대로 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모님은 돈을 줄 테니 노동자들에게 회사로 오라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응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들은 회사에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노동자들의 외화송금계좌를 만들어 놓을 테니 통장으로 입금해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회사로 가서 받느냐? 통장으로 입금하느냐를 가지고 오전 내내 큰 소리가 오고 갔다.
"회사가 그렇게 큰소리 칠 형편이 못될 텐데요."
이 말이 결정적이었는지, 오후 들어 사모님이 부드러운 톤으로 목소리를 바꿨다.
"좋습니다. 외화송금계좌로 입금할게요."

그러나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달았다. 람야이는 여권 기한이 지나서 외화송금계좌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씨투나인이었다. 그의 조국 미얀마는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분류하는 바람에 그 나라로는 아예 송금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만들어놓은 외화송금계좌가 아무 쓸 모 없게 되었다.

이제 방법은 돈으로 직접 받는 길밖에 없었다. 나는 사모님에게 돈을 직접 줄 의향이 있으면 발안에 있는 우리 센터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사모님은 타협책을 제시했다.
"회사 근처에 우체국이 있어요. 어차피 돈을 찾아야 하니까 그 우체국에서 만나지요."
"좋습니다."

노동자들에게 회사 근처에 가서 사모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자 그들은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졌다. 람야이는 너무나 무서워서 눈물을 흘렸다. 아니, 사모님 말로는 찜질방도 같이 갈 정도로 친했다는데 뭐가 그리 무서운가? 한국 여자가 이리도 무서운가?

나는 그들을 달랬다.
"괜찮아. 내가 같이 가니까."
람야이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회사에 한국사람 많아요. 무서워요."
"괜찮아. 나도 한국 사람이야."
"옛날에 돈 안 줬어요."
"옛날에 끝! 지금 옛날 아니야. 지금이야."

▲ 눈물을 훔치는 람야이(왼쪽)와 동생을 쳐다보는 동바이 @한윤수

나는 5분쯤 더 울게 내버려 두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회사 안 가. 우체국 가. 괜찮지?"
내가 계속 다독거리자 그들도 체념했는지 눈물을 닦고 따라나섰다.
그래도 불안한지 차를 타고 가면서 동바이와 람야이가 계속 물었다
"갔다가 와요?"
"응. 갔다가 와."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회사 근처에 버리고 올까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우체국 앞에 도착했으나 세 노동자는 차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끌고 들어갔다. 우체국에 들어가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모님이 돈 봉투를 나눠주었다.
"자, 여기 지장 찍어."

그들이 받은 퇴직금은 동바이가 615만원, 람야이가 514만원, 씨투나인이 526만원이었다. 노동자가 요구한 것보다 사모님이 오히려 넉넉히 준 것이다. 돈을 받은 동바이와 람야이는 또 다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때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눈물을 흘리던 동바이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코 위에 손을 모아 사모님에게 합장 배례한 것이다. 이건 자존심 강한 태국인이 좀처럼 하지 않는 최상급 인사로 국왕이나, 오래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이나, 그것도 아니면 무지무지하게 고마운 사람이거나 몸서리칠 정도로 무서운 사람에게나 올리는 인사다.

그런데 사모님은 국왕이나 부모가 아니므로, 그녀에게 큰절을 올린 것은 무지무지하게 고마워서이거나 몸서리칠 정도로 무서워서일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일까?
물론 고마운 마음도 있겠지만,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합장배례하며 우는 것은 압도하는 공포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러지원국 :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면 그 나라에 대하여 경제제재 조치가 행해지며 따라서 송금도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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