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부터 불어 닥친 국제 금융 위기는 중국에게 인민폐의 국제화를 위한 또 다른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금융개혁을 지휘하는 왕치산(王岐山) 부총리 등은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국제 금융질서의 재편을 언급하고 있으며,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의 저우시아오촨(周小川) 총재도 금년 4월 런던에서 열린 G-20 금융 회의를 앞두고 수차례에 걸쳐 세계 통화질서 재편을 강하게 언급하고 나섰다.
이는 일단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발언권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 왔고 미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읽혀졌다. 과연 중국은 미 달러 시대에 도전하는 것일까? 2조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의 달러 표시 국채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이 시기에 강력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명실상부한 세계 제3위의 경제 실체로 떠올랐고, 또 여전히 막강한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미 달러 체제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은 매우 불만스러운 일일 것이다. 미 달러가치의 장기적 하락세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중국은 새로운 기축 통화의 출현이나 국제 화폐의 다양화만이 미 달러 체제에 내재된 위험을 제거해 주고 글로벌 유동성 관리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번 금융위기는 세계가 한 화폐를 중심으로 끌려가다가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자 속수무책으로 당한 면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의견에 동조하는 국가가 많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인민폐의 기축통화화가 언제 쯤 가능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자본 항목의 자유 태환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중국 경제가 국제 사회에 신뢰를 줄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지도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은 1996년 인민폐 경상항목에 대한 태환을 허용한 이후 꾸준히 인민폐의 국제화를 외쳐왔다. 인민폐 국제화의 최종 목표는 기축통화를 지향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민폐의 국제 기축통화화에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우선 한 나라의 화폐가 국제화되려면 상식적으로 다른 국가들이 그 나라의 화폐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계의 제조업 기지로 막대한 무역흑자국인 중국은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화폐를 벌어들이는 국가이다. 이는 무역적자국의 화폐만이 기축통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또 중국의 산업구조가 계속 현재의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산업구조의 조정이나 소비구조의 변화를 동반할 수 없다면 인민폐의 지속적인 국제화 추진은 쉽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인민폐의 가치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실물자산이 필요하다. 비록 브레튼우즈 체제가 순수한 지폐 제도 시대를 개척한 것이기는 하지만 미 달러의 배후에는 분명히 금이나 석유 등 화폐 가치를 뒷받침하고 있는 버팀목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럽연합의 유로화나 일본의 엔화가 미 달러화에 필적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과연 인민폐는 무엇으로 이들을 충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역시 투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자본 시장이 개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투자는 차치하고 환전거래도 통제할 만큼 외환 시장 개방에 신중하다. 물론 이러한 중국의 신중한 조치들이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중국이 충격을 덜 받게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시장의 개방을 단기 내에 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중국의 입장에서도 그다지 급할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의 인민폐 국제화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국이 인민폐의 기축통화화를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면 이는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표를 가지고 진행되는 과정이다. 공식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은 향후 10년의 시간은 인민폐를 주변지역부터 국제화폐로 인식시키는 국제화폐 인식기로, 그 후 10년은 이를 바탕으로 인민폐를 아시아 화폐로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이 잘 이루어진다면 나머지 10년은 본격적인 기축통화 추진기가 될 것이다.
중국은 작년 12월부터 우리나라를 필두로 이미 5개 국가 지역과 인민폐와 타국 통화간의 스왑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그 규모는 5800억 위엔(약 840억 달러)에 달한다. 또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일부지역에서 인민폐를 무역거래 결제수단으로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주하이(珠海), 둥관(東莞) 지역에서는 4월부터 국무원의 결정에 따라 홍콩과 마카오 기업들이 결제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유사한 정책이 광시(廣西)자치구 및 윈난(雲南) 지역에서도 허가되어 이 지역 내 기업들이 아세안(ASEAN) 10개국 기업들과 무역거래 시 인민폐 결제가 가능해졌고 러시아와의 변방 무역도 이미 인민폐로 결제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은 인민폐 국제화를 위한 1단계 조치에 시동을 건 것이다. 인민폐 결제의 확대는 교역비용을 줄이고 환율변동리스크 감소로 이어질 것이며 일정지역 내에서 위엔화 결제 승인은 향후 중국정부의 자본계정과 환전거래의 점진적인 자유화 정책으로 이어지는 기초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이 잘 이루어지고 실제 거래에서 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면 기업들의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위엔화가 단시간 내에 국제교역에서 달러를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환전거래자유화로 인해 유로화처럼 아시아지역 내에서 결제화폐의 기능을 수행할 수는 있을 것이며 이를 계기로 주요 국제통화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연히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 지역의 인민폐 블록 구축 강화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시아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는 실물이고 중국의 계산대로 가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미 아시아 지역에서 시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민폐 결제가 시작되었다. 아시아는 미 달러화, 일본의 엔화 그리고 중국의 인민폐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있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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