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필리핀 여성이 거침없이 들어와 눈을 들어 직원들을 죽 훑어보더니 유창한 영어를 토해냈다.
"캔유스픽잉글리쉬?"
내가 영어 잘하는 필리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티를 내는 사람은 처음 본다. 마치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온 게 아니라, 도움을 지시하러 온 것 같다. 기가 막혀 K주임이 되물었다.
"당신 한국말 못해요?"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이름은 아날린.
사실 아날린은 그렇게 티를 낼 처지가 아니었다. 훨씬 더 자세를 낮췄어야지! 그녀의 사연은 이러했다. 갑자기 엄마가 심장병에 걸렸다는 연락이 왔다. 마음이 급해서 빨리 귀국할 생각에 당장 어제 날짜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3일 후 떠나는 비행기 표를 샀다. 문제는 한 달치 월급을 못 받은 것. 하지만 월급날까지는 아직 열흘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월급날까지 기다릴 수 없어 돈을 빨리 받게 해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 센터에서 사장님에게 무조건 선처를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부드러운 사람이나 할 수 있지!
결국 인생 경험이 많은 R실장이 총대를 메었다. R실장은 전화를 붙잡고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부탁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사장님은 뜻밖의 말을 했다.
"아까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도 전화가 왔더라구요."
"어? 뭐라구요?"
"내가 무슨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월급 언제 줄 거냐고 따지던데요."
R실장이 아날린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아, 그건 잘못되었네요. 그래서요?"
"공무원한테 물었죠. 언제까지 주면 되냐구."
"그랬더니요?"
"그 공무원 말이 14일 안에 주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다구 했죠. 하여간 내가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 아시겠죠?"
"그러게요. 기분 나쁘셨겠네요."
"일을 그만두는 것도 그래요. 다른 사람 구할 여유라도 주고 그만두어야지, 어떻게 당장에 그만두냐구요? 그리고 어제까지 우리 회사에서 일한 직원이 오늘 노동부에 찾아가서 사장을 욕보이는 건 무슨 경우냐구요?."
R실장은 더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엄마가 아파서 그런 거니 이해 좀 해주세요. 왜 우리도 식구가 아프면 정신이 없잖아요. 하여간 저희가 주의 좀 줄게요 그리구요 사장님, 근로자가 글피쯤 출국한다는데 그 안에 월급 주시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지금 내 기분으론 못 줍니다."
R실장이 한껏 머리를 조아렸다.
"딱한 사정을 보셔가지구 어떻게 선처 좀 안될까요?"
"안됩니다."
사장님은 설득이 안 될 정도로 완강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R실장은 수화기를 놓고 아날린을 가볍게 나무랐다.
"왜 노동부를 찾아갔어요? 먼저 사장님한테 부탁을 드려야 하는 건데!"
그러나 아날린은 흥분했다.
"내가 뭐 나빠요? 급해서 노동부 간 건데."
R실장은 기가 막혔다.
"그러면 안되요. 사장님 잘못한 거 하나 없어요. 한국 법에 14일 안에만 돈 주면 되요. 사장님이 화가 나서 14일 후에 준다니 이제 할 수 없어요."
"그럼 돈 안 받아줘요?"
"안되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외화송금계좌 만들어놓고 일단 필리핀 가세요. 우리가 틀림없이 14일 안에 받아줄 테니까."
아날린이 화를 팍 냈다.
"왜 안 도와줘요? 만일 맘(마담) 엄마가 아파도 이럴 거예요?"
R실장을 비롯해 모두가 말문을 닫았다.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프다는 것도 알고 사정이 딱한 것도 안다. 하지만 아무리 사정이 딱하더라도 부탁은 부탁대로 정중히 해야 한다. 사정이 딱하다고 모든 게 용납되는 게 아닌데 그녀는 왜 그걸 모를까?
그녀는 분해서 씩씩거리다가 나갔다.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센터를 또 찾아갔을 것이다. 문득 떠돌이별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별.
그녀는 그 별처럼 이 센터에서 저 센터로 계속 떠돌아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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