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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표 공정성은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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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표 공정성은 '괴물'이다"

[2009 위기의 KBS 해부]<11>'공정방송' 혹은 '공정한 편향'

언어는 그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공감할 만하다. 기실 언어는 어떤 의미를 담는 그릇일 뿐 그 자체로서 의미는 아니다. 의미는 언어라는 그릇에 담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생성된다. 따라서 어떤 용어가 누구에 의해 혹은 어떤 조직에 의해 불려지고 명명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방송' 버리고 '공정방송' 내건 이병순


KBS가 스스로를 '공정방송'이라고 지칭하고 나섰다. 오랫동안 주목받아 오던 '국민의 방송'은 '공정방송'으로 순식간에 교체됐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이 공정방송이 눈에 거슬린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공영방송, 공익방송은 들어봤어도 공정방송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때 말하는 공정성은 논의하는 학자의 수만큼이나 그 개념과 구성요소가 천차만별이어서 미디어 현장과 사회적 제 관계 간에 합의할 만한 것이 사실상 없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언론의 공정성은 선험적이고 규범론적 차원의 논의일 뿐이다. 따라서 공정성을 실제 방송현장에 직접 가져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방송에서 공정성의 원칙(fairness doctrine)은 국내 공정방송론자들이 기꺼이 인용하는 미국에서조차 일찍이 폐지된 항목이다. 공정성이 담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상의 기회균등, 균형보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굳이 방송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결정의 밑바탕에는 공정성의 잣대가 그 보다 상위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해친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런 마당에 KBS가 공정방송을 편성철학으로 내걸었다. KBS는 스스로가 사회적 가치 판단의 저울추(공정방송 KBS SB(station break)를 장식하는 저울추를 보라)인 양 용기 있게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국민의 방송' KBS가 왜 갑자기 공정방송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KBS는 이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나 해석도 주지 않았다. 다만 알려진 바로는 2003년 대통령 탄핵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공정방송 논쟁이 공정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 없이 정치권의 권력이양과 더불어 손쉽게 KBS로 진입해 갔다는 것뿐이다.

▲ 한국방송의 로고 '공정 공익 KBS' ⓒKBS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그리고 '사회적 정의 제시하기'


미디어는 사법기관이 아니다. 죄와 벌의 형량을 일관성과 평등성에 입각해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법치주의에서 미디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송이나 신문, 아니 그 외의 어떤 미디어라도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도 좋다는 권한을 부여받은 적이 있는가? 혹여 주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판단을 사회적 정의라 할 수 있는가? 그러한 판단이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가? 방송이 진정으로 불만이 없을 정도로 책임 있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미디어 개론서가 제안하는 미디어의 첫 번째 덕목은 사회적 이슈를 이슈 그 자체로서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공정성의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부합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언론은 있는 사실마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더욱이 사회적 정의가 분명한 사안에 대해서도 공정이라는 잣대는 그 반대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탠다. 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두 가지 리스트에 대해 하나는 왜 이토록 발가벗겨지고, 다른 하나는 왜 이리도 숨겨지고 있는가? 과연 공정한가? '불편부당'이라는 기의 없는, 아니 기의를 왜곡하는 기표처럼, 공정방송에는 '공정한 편향'이 구조적으로 숨어있다고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KBS표 공정성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됐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KBS가 말하는 공정성은 근대 저널리즘 역사에서 말하는 그런 공정성이 아니다. KBS표 공정성은 이미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공정방송 KBS라는 기표에 부여된 기의 자체는 불순할 수밖에 없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KBS표 공정성은 우리가 아는 그 공정성과 마찰할 수밖에 없는 '괴물' 같은 그 무엇이다. 이런 마당에 KBS의 프로그램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정성을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오히려 공정성 시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방송 현장의 맥락에서 볼 때, 공정방송과 같은 편성철학은 전체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편성철학은 방송사의 존재조건과 시대적 요청에 대한 면밀한 검토 하에서 방송사 구성원과 시청자의 동의를 얻어 채택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KBS는 공정방송이 아니라 차라리 언론의 기본요소라 할 수 있는 '감시와 견제'로 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뻔 했다. 그것이 융합 미디어가 남발하는 작금의 시대에 한국 최고의 미디어 기업인 KBS가 진정한 미디어의 존재조건이 과연 무엇인지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수신료 인상의 해결방안 역시 바로 그곳에 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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