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한국사람 같으면 눈 감고 넘어갈 정도의 작은 문제를 들고 상담하러 오는 외국인 중에는 필리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필리핀 사람은 왜 그럴까? 영어 사용 민족이라 대단히 합리적이어서? 하여간 그들은 아주 작은 문제도 분명히 처리하고 싶어 한다. 그걸 말릴 수는 없다. 상담자들은 작게 보지만 본인에게는 큰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긴급하고 중요하고 진짜로 억울한 문제들이 쌓여 있는데, 아주 작은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면 우린 미친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빨리 해결된다는 보장이 있는 게 아니니까. 작아도 몇 개월씩 끄는 문제가 있는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에는 우린 너무 바쁘고 솔직히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우리 센터가 내린 결론이 있다.
<아주 작은 문제는 노동자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
이렇게 노동자에게 문제 해결을 전적으로 맡겨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로멜라 케이스라고 부른다.
로멜라는 내가 본 필리핀 사람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퇴직금과 *국민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센터를 방문했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회사에 전하지 못할 정도로 수줍은 여성이었다. 나중에는 동료들의 문제까지 들고 오는 적극적인 여성으로 변했지만.
어쨌든 우리 센터는 그를 대신하여 8개월여 동안 회사와 밀고 당기는 협상을 계속했다. 만일 밀린 돈을 지급할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는 회사라면 노동부에 진정을 넣지 않고 우리 선에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회사 입장에서나 노동자 입장에서나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되는 원만한 처리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여간 2008년 7월 8일에 시작한 협상은 2009년 3월에야 끝나서 그녀는 4백만원이 넘는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감격했다.
"저는 정말 이 돈 못 받는 줄 알았어요! 그 동안 아무도 받은 사람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사흘 후 로멜라가 2년치의 월급명세서와 출퇴근기록부와 그밖에 갖가지 증빙서류를 다 가져와서 내 책상 위에 턱하니 올려놓은 것이다.
"목사님, 사실은 야간수당 더 받아야 되요."
자로 재보니 서류의 두께만 1.2 센치! 웬만한 사륙배판 참고서를 뺨치는 부피였다. 대단하구먼! 하지만 겉보기만 대단하지, 내용은 별 게 아니었다. 대략 서류를 훑어보니 야간수당으로 더 받을 금액은 많아야 십여 만원에 불과했으니까. 이걸 처리해주려고 또 한 사람의 직원이 몇 달을 씨름해야 하나? 또 지난 8개월 동안 쌓아온 회사와의 신뢰는 어떻게 하고?
하지만 로멜라에게 차마 솔직히는 말 못하겠고, 빙빙 둘러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야간수당은 회사의 서류와 대조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우리는 회사의 서류를 가져와라 마라 할 권한이 없어요. 노동부 근로감독관은 가져오라고 할 권한이 있지만. 그러니 이 문제는 로멜라가 노동부에 직접 가지고 가서 해결하도록 하세요."
로멜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우리 센터는 필리핀 사람들의 작은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국민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 회사에서 국민연금 6개월분을 미납하여 로멜라는 3년 만기후 출국시 그만큼 국민연금을 적게 지급받았다. 센터에서 그 부족분 134만원을 더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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