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통신선 단절이 계속되는 상황은 의미가 크다. 북한이 봉남(封南) 전략을 더욱 노골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명백해 보이며 남북 경색은 점차 피할 수 없는 구도가 되어가고 있다.
▲ 9일부터 시작된 '키 리졸브'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한 장면. ⓒ연합뉴스 |
몇 가지 상상, 몇 가지 우려
이런 저런 우려가 증폭되어 가는 가운데 몇 가지 가설적 상황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만약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남북관계가 이처럼 경색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까.
핵문제를 두고 미국과 북한 양측이 가지는 이익과 목표를 고려할 때 북미관계의 접근과 협상을 통한 해법 강구는 예상된 수순이다. 오바마 미 행정부는 그들대로 부시 행정부의 실패를 거울삼아 조심스레 대북 접근을 모색했을 것이다. 북한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체제 안정을 담보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공언해 왔던 터라 그 목표를 향해 움직였을 것이다.
북미 양국이 협상 국면을 개시하는 과정에는 갖가지 선전전과 으름장, 선제압박 등의 전술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때 남북관계가 적어도 대화의 통로를 유지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협력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한국은 북미관계의 접근 과정을 중재하고 평화 위주의 촉진 전략을 구사하며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선순환 구도 속에서 한국은 외교력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팽팽한 기싸움을 벌일 때 남북관계에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다면 아마도 북한은 한국을 통해 미국에 접근하는 방도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위 '통남통미' 구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북한에 대한 접근 방법에 한국의 대북관계를 충분히 활용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래저래 한국은 그 입지가 위축되어 버렸다. 창의적 발상도 난감하게 되었다. 대화 단절이 북한의 책임이라고 공을 떠넘기고 있지만, 정권 초반 서슬 퍼런 발언들이 우리 측 정책 책임자로부터 나왔던 점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발언에 대해 오해하고 안하고는 상대방 몫이라지만, 만약 그 발언들이 다소간 오해를 낳았다면 그로 인한 불신 구도를 풀어볼 의지도 별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남북의 대화가 단절되는 상황까지 이르고 말았다.
위기 증폭 게임의 네 가지 메커니즘
바야흐로 남북관계는 '위기 증폭의 게임'이 시작되려 한다. 위기 증폭의 메커니즘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동하지만, 위기가 안정적으로 관리되거나 해소되지 못하고 증폭되어 버리는 첫 번째 요인은 대화의 부재로 인한 불신 구조다.
대화 채널이 차단된 상황에서 정책 결정에 작용하는 인식과 논리는 오로지 자기중심의 자폐성을 갖기 마련이다. 자폐적 논리 속에서 정보의 흐름과 해석은 쉽게 왜곡된다. 소위 오인(misperception)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책 결정이 만들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위기 증폭을 가중시키는 심리적 조건들도 있다. '과거 성공사례에 대한 과도한 평가' (over-evaluation of past success)가 그 하나다.
주지하다시피 북한도 이명박 정부 길들이기의 의도를 가진듯하다. 실제 북한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초반에 '팀 스프리트'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비난하며 '서울 불바다'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강공일색이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미국과 제네바 합의를 타결했다.
북한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봉남 정책이 당시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북한의 심리 구도가 이러한 평가에 기반한 자폐성을 갖는다면 위기 해소는 더욱 어려워진다.
위기 증폭의 심리학에서 또 하나 주목해 봐야 하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overconfidence)이다. 남측이나 북측 모두 강경한 정책이 상대방 길들이기에 유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더 강경한 발언이나 의지 표명이 상대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억지하는(deterrence)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억지 전략이 별반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국제정치 이론들이 입증하고 있다. 불신과 증오만 가중시킬 뿐이다.
위기 증폭의 정치학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국내정치다. 정책결정자들이 국내정치적 압력과 정치적 이익 계산 때문에 위기를 쉽게 풀어낼 수 없는 구도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국내정치를 고려한다면 이런 저런 이유로 불길한 우려가 상상을 자극한다. 북방한계선(NLL)이나 군사분계선 상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이 발생한다면 우리 사회의 안보불안 심리가 더욱 증폭될 것이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안보 궐기대회라도 한 두 차례 열리고 나면 정부가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위기는 그 자체로서 재생산되는 구도를 가지게 된다. 위기 국면에서 당사자는 어느 누구도 돌파구를 찾기 어렵게 되어 제3국의 중재적 개입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 키 리졸브 훈련에 대한 찬반 집회 장면. 국내 정치는 위기 재생산의 중요한 요인이다. ⓒ연합뉴스 |
위기는 생물이다
남북관계에 관한 한 이명박 정부가 어떤 구체적 이익과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모호하기도 하지만 점차 원치 않는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상황까지 모두 계산에 넣고 지난 1년을 버텨왔는지도 모른다고 슬며시 자위해본다.
그러나 위기 증폭의 심리적 메커니즘에는 '위기 경고에 대한 감각의 상실'(insensitivity to warnings)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정부가 사태 심각성에 대해 점차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앞선다.
위기는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상황까지 만들어 내는 생물과도 같고, 그것이 위기의 정치학에 내재된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불길한 상상들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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