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전 세계는 여전히 작년 말에 터진 금융위기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도 실업률의 상승과 제조업의 약화로 몸살을 앓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주변 동북아 국가들이나 구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중국이 받은 충격은 매우 국소적이고 경미하다. 오히려 인민폐는 이 기회에 동아시아를 통괄하는 국제적 통화로 등극할 태세이고, 중국의 정치력은 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만큼 무게를 더해간다. 미국인들은 지갑을 굳게 닫았지만, 중국의 내수시장은 여전히 활황이고, 각국의 원자재는 중국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 상대적인 여유 속에서 중국인들은 전지구적 금융위기를 걱정하기보다는 내심 2008년 올림픽을 통해 다져진 '중화'의 기반을 어떻게 더 공고히 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듯하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중화(中華)'의 패턴
서주(西周) 시기 '중화'는 주 왕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영토적 의미였다. 그들은 이 중화를 '중국(中國)'이라고 불렀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에 정치권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주 왕실이 몰락하자 '중국'은 제후국의 연맹을 의미하는 관념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에 정치적 연맹체란 의미가 첨가된 것이다. 서주 말엽, 철인 공자가 출현하면서 정치적 연맹체였던 '중국'은 점차 문명국의 의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공자는 오랑캐의 나라에 군주가 있더라도 중원에 군주가 없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논리로 '중화' 문명의 우월성을 강화했다. 공자의 화법은 고급문화로 상징되는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었으나, 그의 후예들은 이에 '중원(中原)'이란 영토의 차별성과 '한족(漢族)'의 민족 우월성의 의미를 덧붙여갔다.
그 후 진한(秦漢)대에 이르면, '중국'은 주변의 변방 민족을 편입시키면서 '신중국'으로 탈바꿈한다. 과거의 야만국이 '중국' 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중화질서가 출범하게 되었다. 진한대 중화문명은 크게 네 가지 패턴으로 구성되었다.
주변 야만국까지 아우르는 천하 공간으로서의 '중국', 한족과 오랑캐 민족을 포괄하는 다민족공동체, 그리고 '중국'밖의 신오랑캐국으로 설정된 고려, 일본, 월남 등과 맺은 책봉-조공의 중화질서, 그리고 '중국'을 문명국으로 만든 소프트웨어로서의 유교문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영토', '민족', '질서', '문화'로 대표되는 중화 4패턴이다. 이 4패턴은 중국 역사 속에서 서로 삼투하고 융합하였고 때로는 위계를 서로 바꿔가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신중화의 4가지 패턴
제국의 시대가 도래 할 때마다 어김없이 '문화'는 최상위 위계로 상승했다. 이 '문화'의 조율 속에서 나머지 3패턴은 새롭게 역할을 부여받았다. '영토'는 제국의 확장을 꿈꾸거나 또는 만리장성의 장벽을 둘렀다. '민족'은 때론 한족이데올로기를 강조하거나 때론 다민족다원주의를 내세웠다. '중화 질서'는 중원의 우월의식 속에서 항상 주변국에 대해 책봉과 조공의 상하 관계를 강요하였다. '문화'는 항상 주어진 시대를 선도하는 소프트파워를 핵심으로 발휘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이데올로기를 의미하지 않고, 당시 사회 전반을 감쌀 수 있는 문화 역량, 즉 소프트파워(Soft Power)를 의미한다. 중국 역사 속에서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강력한 소프트파워는 중국의 정치 경제적 요소와 결합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거대한 역량으로 발전하였다.
21세기 초 중국은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실험의 시대를 넘어 중화의 중흥을 꿈꾸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중화' 패턴은 과연 어떠한가? '영토'는 문화의 조명을 받아서 실효지배의 영토 확장보다는 무형의 역사공정을 벌이고 있다. 동북공정과 서남공정이 그 실례이다. '민족'은 청나라 이후 가장 광대한 영토에 포섭된 소수민족들을 모두 아우르는 중화민족주의가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중화민족주의를 애국주의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집어넣어 대동단결을 꾀하고 있다. '중화 질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주변국과의 화합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화평굴기' 즉 평화롭게 동반 발전하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막후에서 조율하는 '문화'는 어떠한가? 21세기 중국의 '문화'는 단일에서 다원의 방향으로, 단절에서 연속의 방향으로 그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
굴기 - 부흥 - 중회(重回)의 행보와 새로운 소프트파워
2006년 중국 CC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崛起)'는 강대국이 되는 조건 중에서 '소프트파워'에 주목하였다. 문화가 저변에서 뒷받침되지 않는 나라는 결코 진정한 강대국으로 '굴기'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다큐물이 방영된 이후 중국 사회는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었다. 기존의 사회주의 문화만으로 소위 강대국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7년에 '부흥의 길'이 방영되었다. 중국판 용비어천가와 같았던 이 다큐물은 시각의 편향성에도 불구하고 '부흥'을 외쳤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작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은 '중회한당(重回漢唐)'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는 한제국과 당제국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자는 의미를 지닌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소프트파워도 함께 구동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라는 획일화된 관방 이데올로기가 중국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면서 문화는 급속도로 다원화되었다. 자본주의 문화, 서구 및 동아시아 대중문화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 가치관과 충돌되고 또 융합되었다. 시내 한 구석에선 체게바라와 마오쩌둥의 연극이 상영되고, 다른 한 구석에선 증권거래소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풍경이 결코 낯설지 않다.
서구 자본주의 문화, 동아시아 대중문화, 기존의 사회주의 문화가 중국 사회에서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중국인들은 '신중화(新中華)'의 동력으로서 자국의 전통문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는 5·4 운동 이후 맹렬하게 서구의 선진 문명을 흡수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여 거침없이 달려온 그들이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새벽마다 고대 경전을 외우는 독경운동이 일어나고,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선 당시(唐詩)를 외우며, 서점가에선 논어와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TV에선 백가강단(百家講壇)을 통해 중국 고전을 다시 배우고 있다. 봉건과 폐습으로 치부되어 근현대 역사 속에서 단절되었던 전통문화가 다시 중국인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그들이 눈을 돌린 새로운 소프트파워는 루쉰(魯迅)의 정신에 공자의 영감을 덧입히는 것이고, 후진타오의 노선에 한당(漢唐)의 노하우를 조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융합의 실험이 성공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원과 연속으로 가는 기로에서 전통문화와 같은 소프트파워가 현 중국 사회를 훨씬 더 활기차고 충실하게 만들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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