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국내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신작 <적벽대전2: 최후의 결전>이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중화권 영화들의 대작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강렬한 정사 신으로 주목 받았던 <색, 계>가 180만 명이라는 기록에 그쳤고, 장이머우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영웅>과 <연인>도 각각 80만 명과 140만 명을 동원했던 점을 미뤄볼 때, <적벽대전2>의 흥행은 매우 이례적이다. 전편이었던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은 150만을 동원하는 데 그쳤으나, 2편 <최후의 결전>은 개봉 2주 만에 일찌감치 전편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본격적인 전쟁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 다소 밋밋했다는 평가를 받은 1편에 비해 이번 <적벽대전2>는 웅장한 스케일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제갈량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가득 실은 배 20척을 끌고 조조의 진영을 찾아가 화살 10만 개를 공수해 오는 장면이나 주유가 화공을 이용해 조조의 수군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장면은 과연 스펙터클했다. 양조위(주유), 금성무(제갈량), 장전(손권), 장풍의(조조) 등 호화 캐스팅과 더불어 이들이 빚어내는 묘한 심리전과 갈등 또한 강한 흡인력을 보여줬다. 오우삼의 상징인 흰 비둘기도 적절한 시점에 날아올라 흥미를 돋웠다.
<삼국지>는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적벽에서의 전투는 그 중 백미로 손꼽혀 왔다. 익숙한 이야기인데도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기존의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내는 콘텐츠의 힘 때문일 것이다. 역사로부터 시작되어 소설, 연극, 영화, 만화, 게임에 이르기까지 양식과 장르를 바꿔오며 수백 년간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 <삼국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의 문화 중에는 현대적 콘텐츠로 재탄생될 수 있는 '원형'들이 무궁무진하다. <뮬란>은 여남은 줄 밖에 안 되는 고대의 서사시 한 편이 한 시간 반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경우다. 중국 대중문화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이런 '문화 원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리우드의 적극적인 시장 개방 공세에 대비하여 자국의 영화 제작 역량을 강화한 뒤에나 순차적으로 '개방'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중국 영화계에서 장이머우나 펑샤오강 등은 이를 실현해 줄 대표 감독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제작되던 '대작'들은 이념적 편견이라는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국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영웅>이나 <연인>, <황후화> 등의 이야기는 끝내 절대 권력을 부정하지 못하고 옹색하게 마무리되는가 하면, <집결호>는 아예 대놓고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유해 발굴을 위해 애쓰는 정부의 노력을 선전했다. 대작 상업영화들이 이른바 '주선율 영화'(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정부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자 제작을 지원하는 국책 영화의 일종)화하면서 상업성과 이데올로기가 삼투하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편협한 이데올로기로 중국 영화가 자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화'한다는 것은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그 공백을 메워준 이들이 바로 오우삼, 리안, 서극 등 타이완이나 홍콩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건너 가 실력을 검증받은 '화인 감독'들이다. 장이머우 등의 영화가 단순치 않은 부작용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이들은 미국에서 준비된 인적 자원과 기술, 자본의 힘을 가지고 거꾸로 중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리안의 <와호장룡>은 중국 영화의 대작화 경향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색, 계>는 중국 영화에 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경험과 자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통해 '중화' 문화의 보편성과 우수성을 대내외에 선전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들은 천카이거의 <무극>이 보여준 것처럼 어설픈 컴퓨터 그래픽으로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오우삼이나 리안은 중국 고유의 풍부한 문화원형을 활용하면서도 거기에 할리우드의 세련된 기술을 접목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적벽대전>은 중국영화그룹과 청티안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았으면서도 무술 감독(<엑스맨>의 코리유엔)이나 컴퓨터 그래픽(<매트릭스>의 크레이그 헤이스), 디자인과 의상(<와호장룡>의 티미 입) 등과 같은 중요 임무에는 할리우드 스탭들이 대거 동원됐다.
이념을 배제하고 오락성을 강화하면서도 영화를 통한 '중화'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려는 중국의 전략과 중국의 영화 시장을 속히 개방시키고 싶은 할리우드의 욕심이 오늘날 중국 영화의 '대작'들을 잇달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아무리 이념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중국은 하나"라는 명제만큼은 놓칠 수 없다. <적벽대전2>의 전투가 모두 끝나고 난 뒤, 주유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라고 내뱉는 고백은 "셋으로 갈린 중국"이 가져온 공포에 대한 보상이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우산 아래서 이제 중국 영화는 대륙은 물론, 홍콩 영화와 타이완 영화를 포섭하고 나아가 해외 '화인 영화'까지도 아우르면서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한류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을 거듭한 중국 영화와 대중문화 콘텐츠는 중국적 특수성과 인간 보편성의 결합이라는 전략으로 아시아를 넘어서는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 위력적인 도전에 응전할 것인지, 그 또한 학습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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