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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30년, '순교자 묘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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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30년, '순교자 묘소'를 가다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77> 6월 대선 앞둔 테헤란 분위기

흔히 '호메이니 혁명'으로 알려진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은 인류 혁명사에서 프랑스혁명(1879년), 볼세비키 혁명(1918년)과 더불어 나라 안팎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란 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1919~1980)를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든 이슬람 혁명은 이란을 안팎으로 급격하게 바꾸었다.

인구 700만의 거대 도시 테헤란은 겉모습부터 달라졌다. 현지 사람들의 얘기를 모아보면, 한때 '중동의 파리'라 불릴 정도로 흥청대던 테헤란 중심가의 카페와 술집들이 사라지고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금주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미니스커트의 물결이 사라지고 검은 차도르만이 거리를 메우게 됐다.
▲ 이슬람 혁명 30주년을 맞아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식 ⓒ김재명

그런 사회적 변화는 정치적 변화에서 비롯됐다. 친미와 온건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뜻을 따르는 반미 보수 강경파가 이란 정치를 주름 잡았다.

많은 이란 국민들의 시각에서는 이슬람 혁명의 성공은 외세(영국과 미국)에 기대어 비밀경찰 사바크로 대표되는 공포의 독재로 국민 저항을 억누르던 팔레비 왕조의 몰락을 뜻했고, 나아가 이란의 주요자원인 석유가 외국(미국과 영국)의 수탈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했다.
▲ 1979년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 ⓒ김재명

▲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에는 이란-이라크전쟁(1980-88년) 당시 전사자와 1979년 이슬람혁명 때 죽은 이들이 함께 묻혀 있다. ⓒ김재명

피를 뿌리고 성공한 혁명

이슬람 혁명이 거저 성공한 것은 아니다. 많은 피를 뿌렸고, 혁명적 분위기는 그런 붉은 피를 먹고 커갔다. 1978년 9월 8일 금요 예배를 마친 뒤 팔레비 독재에 항거하며 테헤란 거리에 나섰던 민중들은 잘레흐 광장에서 일어난 진압 경찰 발포로 말미암아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이란 사람들은 그 사건을 '검은 금요일의 학살'로 부른다.

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금요일의 학살'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으로 치면 1960년 경무대(청와대) 앞 발포 사건이나 1980년 5.18 광주 학살과 비슷한 사건이다. 그때껏 계엄령으로 정권을 이어가던 팔레비 독재와 대화와 정치협상을 통해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을 분노로 몰아넣었고, 이슬람 혁명의 불길을 치솟게 만든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팔레비 왕조에 충성하는 군대와 경찰의 발포, 비밀경찰 사바크의 고문 등으로 희생된 숫자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어떤 이들은 6~7만 명으로 꼽지만, 3000명 안팎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곳 가운데 가장 큐모가 큰 곳이 바로 테헤란 남쪽, 이란의 대외관문인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고속화 도로 가에 자리잡은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다.
▲ 1979년 팔레비 왕에 충성하는 경찰의 발포로 2명의 가족을 잃은 한 이란인이 묘소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김재명

▲ 남편의 묘소 앞에서 슬픔에 겨워 우는 이란 여인 ⓒ김재명

순교자로 추앙 받는 혁명 희생자들

이슬람 혁명 30주년을 맞아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를 찾아가봤다. '베헤시트-에'란 이란 말로 '천국'을 뜻한다. 이곳에는 혁명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그리고 이슬람 혁명 성공 바로 다음 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맞붙어 8년 동안 치러졌던 이란-이라크 전쟁(1980~88년)에서 생겨난 50만 명의 전사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묻혀있다.

이름이 널리 알려졌건, 무명이든 상관없이 이란 사람들은 이곳에 모셔진 사람들을 '순교자'라 일컫는다. 이란 이슬람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뜻이다. 한국으로 치면 국립현충원인 셈인 이곳에는 전 수상 모하마드 자바드를 비롯한 이란 혁명 지도자들도 잠들어있다.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묘소들의 특이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죽은 이의 얼굴이나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유리창 안에 보관돼 있고, 묘소 주변은 꽃과 깃발들이 장식돼 있다.

혁명 30년을 맞아 조문객들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아들 또는 남편을 잃은 부녀자들이 검은 차도르를 입고 히잡을 머리에 두른 채 고인을 기리는 모습이다.

이슬람 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도 1979년 2월 1일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란 민중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테헤란 공항에 내린 바로 뒤 이곳 묘소를 찾아 '순교자'들에게 꽃을 바쳤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많은 이란 사람들에게 정신적 스승과도 같은 존재다. 이란 사라들은 이슬람 종교의 성인에게 붙여지는 '이맘'이란 호칭을 호메이니에게 붙여 그를 '이맘 호메이니'라고 부른다.
▲ 희생자에게 꽃을 바치는 한 여인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하다. ⓒ김재명

▲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 바로 곁에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시신이 잠든 거대한 이슬람사원이 있다. ⓒ김재명

참배객으로 붐비는 호메이니 묘소

베헤시트-에 자흐라 묘소 바로 옆에는 혁명 성공으로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로서 절대적 영향력을 휘둘렀던 아야톨라 호메이니(1902-1989년)의 시신을 모신 거대한 건축물이 있다.

네 귀퉁이에 91미터 길이의 높은 탑을 두른 이슬람 사원(모스크) 안에 모셔진 호메이니의 시신 앞에서는 혁명 30주년을 맞아 참배객이 평소보다는 훨씬 많이 찾아와 기도를 드리고 간다.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페르세폴리스 유적지로 잘 알려진 이란 남부 도시 이스파한에서 가족과 함께 왔다는 한 참배객은 "내 아이들에게 이맘(호메이니의 존칭)의 고귀한 혁명정신을 심어주려 왔다"고 했다. 이란의 언론은 대부분 친정부 논조를 지닌 까닭일까, 혁명 30년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란 현지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슬람 혁명을 긍정하면서도 그 뒤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다른 목소리들도 듣게 됐다.

이란은 올해 6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강온파로 나뉘어 술렁대는 모습이다. 이슬람 혁명 30년을 맞은 해에 치러지는 선거라서 이념 대립이 겉으로 더 불거질 전망이다.
▲ 호메이니 묘소로 들어가는 사원 입구에는 1979년 2월 1일 테헤란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들이 걸려있다. 호메이니는 혁명 성공 10년만인 1989년에 눈을 감았다. ⓒ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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