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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저 송전탑에 오를 '대기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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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저 송전탑에 오를 '대기표'를 들고 있다

[쌍용차 국정조사 연속 기고 ④] 일상이 되어버린 농성장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① 쌍용자동차 국정조사가 왜 필요한가 ② 사측이 제시한 무급휴직자 복직 카드의 문제점 ③ 국정조사가 진행되면 정말 회사는 망하는가 ④ 새누리당과 박근혜 당선인이 국정조사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이유 ⑤ '함께 살기' 위해 국정조사가 필요한 이유 ⑥ 쌍용자동차지부가 문제 해결의 주체여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6회에 걸쳐 기고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쌍용차 국정조사 연속 기고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는 꼭 필요한가?
'쌍용차 무급자 복직 합의' 발표의 불편한 진실
쌍용차, '먹튀'에게 또 당하지 않으려면…

여느 겨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날이 추위가 더하고 있다. 일상에서 체험하는 혹독한 추위는 지구 온난화란 우리의 상식을 매섭게 비웃는다. 무엇이 잘못됐다. 설마 지구 온난화를 진단한 그 많은 전문가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영화 <트루먼 쇼>에서처럼 어떤 거대한 음모가 우리 일상을 조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모두 아파하는데 누구도 울지 않는다. 아무리 아프다고 외쳐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저 높은 송전탑에서 농성을 해도, 40일이 넘게 단식을 해도, 해고 노동자가 삶의 끝에서 절규해도 일상은 그대로다. 무려 1800일이 넘게 노동자로 대우해달라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의 외침도 일상처럼, 연말연시의 장식품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지금도 콜트·콜텍에서, 풍산마이크로텍에서, GM 부평공장에서, 또 어디 어디에서….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우리의 상식과 일상을 비웃으며 그 이상의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고 외친다. 정말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흔히들 자본주의의 과잉이 이런 위기를 몰고 왔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휘몰아치는 투기 자본에 분노하고, 뉴스를 통해 접하는 눈먼 자본의 횡포에 가슴 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본의 달콤함을 꿈꾼다. 농성장의 차가움은 백화점의 화려한 불빛에 현혹되어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다. 삼성의 비인간적 행태를 비난하는 나와 삼성의 화려함을 동경하는 나는 같은 사람인가. 자본의 현란함과 현실의 혹독한 추위는 다른 것일까.

일상이 되어버린 농성장. 그곳을 지나며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저 자리에 저렇게 죽은 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저들이 앉아 있었다는 듯 무심히 바라본다. 대한문이 그 어느 왕조시대부터 저 자리에 있었듯이. 어깨를 움츠린 채 추위에 떨면서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농성장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화려한 불빛만 바라보면 이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듯이.

모두 노동자이지만 아무도 노동자가 아니다. 모두 일하지만 아무도 노동이라 부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단지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송전탑 위에 선 사람과 그들을 그 위에 세운 사람들, 그리고 이 일과는 무관한 듯이 스쳐 지나가는 나머지 대부분으로 나뉠 뿐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내일 내가 저 위에 서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송전탑 농성장.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제공

그러나 자본이 과잉으로 치닫는 이 시대는 결국 저 위로 사람을 내모는 극소수의 그들과 그렇게 내몰리는 이들로 나뉜다. 그리고 그 '대기표'를 들고 그 밑을 지나는 대부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차이를 두고 언젠가는 저 첨탑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첨탑 위에 서게 될 사람의 친구로, 가족으로 또는 친인척으로 이 첨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끝없이 질주할 것이며, 과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역사와 현실이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모두 파멸하는 길이 있다. 한계 지어진 세계는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공산주의 세계의 붕괴를 보고 자본의 화려함과 나의 안락함을 꿈꾸면서 자본주의를 맹신하지만, 그 끝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자본의 횡포에 맞서고 그 모순에 대항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 삶은 가능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자본의 거대한 조작에 휩싸여 우리 삶을 배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다움과 자본 중심의 삶은 절대 공존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사람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자본을 동경하고 그 논리를 내면화하는 행위다.

어떤 형태로든 일어서 나아가야 한다. 노동을 제자리에 두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노동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국 저 첨탑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첨탑의 저 사람이 바로 나와 내 친구,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사람을 위해 자본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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