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고수 이명창(一鼓手 二名唱)'이라는 속담의 '고수'
소설가 최일남 씨는 황호택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의 6번째 인터뷰집 <생명의 강 생명의 불꽃> 발문에서 황 위원을 이렇게 비유했다. 명창이 좋은 소리를 내도록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처럼, 취재원들이 흉금을 털어놓도록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칭찬한 것이다. 최일남 씨는 황 위원보다 앞서 '최일남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를 <신동아>에 연재해 각광을 받았던 필자다. 그런 그가 황 위원을 '이 분야의 선두를 달리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고수'가 인정하는 '고수', 황 위원을 세명대 저널리즘특강에서 만났다.
▲ '어떤 취재든 기본은 인터뷰'라고 강조하는 황호택 위원 ⓒ김종석 |
인터뷰는 '보도 문학'이다
그는 인터뷰에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했다. 육하원칙에 따라 취재원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이 '뉴스 인터뷰'라면, 육하원칙을 넘어서는 진실과 인간적인 체취를 전달하는 것을 '명사 인터뷰(Personality Interview)'라고 한다. 그가 오랫동안 <신동아>에 연재해 온 인터뷰는 전형적인 '명사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명사 인터뷰를 기사이면서 가장 문학에 가까운 글, 말하자면 '보도문학'이라고 정의했다. 원고지로 보통 100~200매에 이르는 심층 인터뷰 기사는 소위 '글발'이 없으면 쓸 수 가 없다. 그러고 보니 최일남씨나 <월간 조선>의 인터뷰어 오효진씨, 그리고 이탈리아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어인 '오리아나 팔라치'도 소설가였다. 이처럼 인터뷰어에게는 기본적으로 빼어난 글 솜씨가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상대의 마음 속 생각을 끄집어내는 능력이다.
"명사로 대접받는 사람들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드러내려고 하는 공적 자아(Public Self)가 발달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공격적인 질문을 받더라도 절대 실언을 하지 않고 요령껏 피해나가려고 하죠. 자기 검열을 통해 절제된 생각만 들려주려는 사람들로부터 진솔한 이야기를 이끌어 내려면 세심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편안한 분위기 만들지 못한 박중훈 인터뷰
그는 명사들의 '공적 자아'를 뚫고 들어가 감춰두었던 사실과 꾸미지 않은 생각을 끌어내는 그 만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첫 번째는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저는 인터뷰 약속을 대략 오후 4시쯤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상대의 집에서 하자고 하죠. 인터뷰를 두어 시간 하다보면 식사 때가 되는데, 우리나라 인심에 비추어 밥 때가 됐을 때 그냥 가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때 그냥 집에서 먹던 밥을 달라고 해서 격의 없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부인에게 폐도 끼치면서 친밀해지죠. 밖에서 식당 밥을 먹어도 함께 식사를 하다 보면 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때로는 술을 마실 수도 있고요."
그는 상대의 집에서 인터뷰를 할 경우 재산 정도, 가족 관계, 집안 분위기 등을 쉽게 알 수 있어 그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집에서 만나기가 어렵다면 그 사람의 일터도 좋다. 사무실의 분위기라든가, 책장에 어떤 책이 꽂혀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그 사람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황 위원은 그러나 유명인과 인터뷰할 때, 대중음식점에 만나는 것은 피하라고 조언했다. 별도의 방이라면 모르지만 공개된 곳에서는 자칫 주의가 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영화배우 박중훈 씨와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여성들이 몰려와 너무 사진을 찍어대는 통에 박중훈 씨가 화를 내고 어수선해졌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철저한 사전조사로 마음의 문을 연 조용필 인터뷰
인터뷰 대상의 마음을 열게 하는 그의 두 번째 노하우는 철저한 사전조사다. 영화배우를 인터뷰하러 간 사람이 그가 출연했던 영화와 배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든지, 국회의원을 만나러 가서 어느 위원회에 소속된 지도 모른 채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전준비를 많이 해야 불필요한 질문 없이 핵심적인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기자가 준비를 철저히 하고 사람을 만나면 상대도 진지해집니다. 예전에 조용필씨를 인터뷰할 때 보니까, 워낙 인터뷰를 많이 해 봐서인지 처음엔 심드렁하더군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꼼꼼히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전에 어떤 언론도 묻지 않았던 질문들을 했더니 자세가 확 달라지더군요."
골프선수 최경주 씨를 인터뷰 했을 때도 '사전 준비'의 덕을 톡톡히 봤다. 사실 최경주 선수의 경우 아주 '실패한 인터뷰'가 될 뻔 했다. 교통난 때문에 황 위원이 약속시간에 15분 늦게 도착하자 최 선수가 마음이 상해 '20분밖에 시간을 내 줄 수 없다'며 냉랭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겨우 20분 동안 나눈 얘기로 심층 인터뷰기사를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 위원은 낙망하지 않고, 최 선수에 대해 사전 조사한 자료를 일부러 탁자위에 높이 쌓아 놓은 채 인터뷰를 시작했다. 특히 언론이 늘 물어보는 얘깃거리는 제쳐놓고, 가까운 사람들을 사전 접촉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을 토대로 질문을 던지자 최 선수의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터뷰는 45분을 훌쩍 넘겼고, 최 선수와 후원회원들의 저녁식사 자리에도 합석하게 됐다.
심지어 최 선수는 식사 후에도 1시간 반이나 시간을 더 내주었다. 덕분에 그는 읽을거리가 아주 풍성한 인터뷰기사를 쓸 수 있었다. 고정 독자들로부터 "지금까지 읽은 인터뷰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는 이런 반전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로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을 유지하는 것'을 들었다.
"만일 최경주 선수의 첫 반응에 자존심이 상해서 싫은 소리로 맞서거나 인터뷰를 포기했다면 기자로서 자격이 없는 겁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서 인터뷰는 성사시켜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어쨌거나 인터뷰 약속에는 절대 늦지 마세요."
껄끄러운 질문을 맨 나중에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인터뷰의 노하우 세 번째는 '폭탄 질문', 즉 파괴력이 크지만, 상대가 극구 피하고 싶어하는 질문은 맨 나중에 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들추어내는 질문을 안 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기자가 폭탄 질문을 포기해선 안되지만, 상대가 화를 내고 일어서서 나가버려도 괜찮을 만큼 취재가 다 됐을 때,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요령입니다."
평생 갈 수 있는 신뢰를 쌓아라
황 위원이 조언하는 네 번째 노하우는 취재원들과 평생 갈 수 있는 신뢰를 쌓으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 명사들은 기자에게 평생 뉴스의 원천이 된다. 잘 나갈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못할 때도 그들은 뉴스의 초점이 될 수 있다. 이런 이들과 언제든지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인간관계를 쌓는 것은 기자에겐 중요한 자산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려면 약속을 꼭 지키는 자세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했던 이야기를 양해 없이 써버린다면 다른 취재원에게도 소문이 나서 '믿을 수 없는 기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의를 지켜야 한다.
▲ ▲ 황 위원은 "인터뷰를 할 때는 취재원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종석 |
잘 듣는 것도 노하우
다섯 번째 노하우는 '잘 듣는 것'이다.
"인터뷰를 할 때는 가급적 자신의 말은 줄이고 상대방이 얘기를 많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많이 아는 지를 과시하기에 바쁜 사람도 있는데, 아주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기자의 질문은 '마중물' 정도에 그치고 상대의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어야 알맹이 있는 인터뷰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초보기자의 경우 상대의 답변에 집중하지 않고 다음에 무슨 질문을 할까 궁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되면 추가질문을 통해 의미 있는 얘기를 유도해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늘 상대의 말에 집중하면서 마음속 얘기들이 술술 나오도록 추임새도 넣고 보충 질문도 해야 한다고 황 위원은 강조했다.
황 위원은 마지막으로 "사소한 것이라도 상대방의 공감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탄광 노동자를 인터뷰 할 때는 평범한 점퍼를 입고 가고, 최고경영자를 인터뷰할 때는 깔끔한 정장을 하는 등 상대의 입장과 취향, 관심을 배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황 위원이 풀어주는 '성공적 인터뷰의 노하우'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니, 어쩌면 이것들은 사람간의 모든 만남과 소통에 기본적으로 적용될 만한 '인생의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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