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飮食男女(음식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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飮食男女(음식남녀)

[김태규의 명리학]<363>

제법 오래 전에 '飮食男女(음식남녀)'라는 대만 영화가 있었다. '오천련'이 등장하고, 음식과 남녀 간의 다양한 연애이야기로 가득한 영화였다. 검색하니 1995 년의 일이었다.

'음식남녀'라고 하니 '남자와 여자를 먹고 마신다'는 풀이도 되고 남녀 간의 사랑을 먹고사는 인생이란 풀이, 또 음식과 남녀 간의 애정이 주된 소재라는 의미도 된다.

그런데 이 '음식남녀'란 말이 언젠가 접한 적이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작년 말, 미국 발 금융위기로 세상이 한창 뒤숭숭할 때, 이 난세를 어떻게 해야만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 빠져 지냈다. 케인즈의 책도 다시 읽어보고, 하이예크의 글도 다시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글 속에 오늘날의 문제, 돈이 너무나도 많아서 생겨난 지금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아이디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이 문제는 어쩌면 돈을 대하는 우리 인간들의 禮義(예의)가 어긋나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禮記(예기)를 꺼내어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 처음부터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 자본주의 세상에 일어난 문제를 놓고 고리타분한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예기를 들추고 있다니 어쩌면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은 말이 된다고 본다.

책을 읽다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소득을 건졌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책 중의 禮運(예운)편을 읽다가 '음식남녀'라는 문구를 발견한 일이었다.

"음식과 남녀간의 사랑은 사람들이 크게 바라는 일이고 사망과 빈고(貧苦)는 사람들이 크게 싫어하는 일이다."라고 되어있으니 그 원문은 "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 死亡貧苦 人之大惡存焉"이다.

먹고 마시는 일과 남녀 사이의 애정 문제가 가장 중대하다고 남도 아닌 공자님께서 말씀하고 계셨으니 재미난 일이다.

생각해보면 실로 그러하다. 좋은 짝을 만나서 잘 먹고 잘 살면 행복한 것이다. 더하여 우리가 싫어하는 바는 죽어 없어지는 일 그리고 빈곤이다. 이야말로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에 중요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니 '음식남녀'야말로 세상을 다스리는 근본 중에 또 근본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다툼도 궁리해보면 내 배를 불리기 위해선 더러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마음에 끌리는 새로운 짝을 만나려다 보니 남의 짝을 앗아 올 때도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나아가서 배가 불러도 더 맛있는 것을 탐하는 우리의 마음이요, 좋은 짝을 만나 살다가도 싫증이 나서 버리게도 되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 세상은 시작부터 지금껏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툼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환상이자 영원한 이상인 것이다.

다툼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결국 우리의 감각적 취향과 변덕을 통제하거나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서야 수양을 통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지만,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야 할 것이니 환상이라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닌 것이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분받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다.

생각해보니 이룰 수 없는 이상에 가깝다.

능력껏 일하게 하려면 능력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누구나 대충 일하는 척 할 것이다.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고 하는데, 필요량에 대한 기준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결국에는 필요 이상을 가져갈 것이다.

결국 능력과 필요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합리적으로 설정할 수 없는 이상 공산주의는 자칫 인간의 본성에 대한 환멸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란 그런 기준을 설정할 수도 그리고 그것을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다는 '상대적 인간관'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능력껏 일해라, 그러면 많이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니. 포만을 느껴서 많이 가져가기 싫다면 적당히 일하든지. 당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자본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란 것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자유에 맡기다보니 너무 심한 불평등이 생겨나는 바람에 그 또한 인도적 견지에서 용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실은 이 문제는 자본주의라든가 공산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을 어떤 식으로 다듬어낼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해 공자는 분명하게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을 禮(예)와 樂(악)으로서 이끌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어떤 체제가 좋은 지 따지기 이전에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키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동물은 수치를 모르지만 만족할 줄 알고, 인간은 수치는 알아도 만족은 모른다. 생각하고 새길 필요가 있는 말이라 여긴다.

수치를 알지만 만족을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 왜 이런 것일까?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기에 수치를 알게 되었다고 본다. 구성원으로서 남들에게 민망한 일을 하기가 어렵기에 수치를 알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인간은 가치 있는 것을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었기에 만족을 모르게 되었다고 본다.

비유하자면, 사자가 영양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하자. 배부르게 먹고 나면 다른 동물들이 먹도록 내버려둔다. 어차피 놔둬봤자 부패하고 썩어버릴 것이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만족하게 된다.

다음에 배가 고프면 어려워도 다시 사냥에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사슴을 사냥했을 때 일단 주린 배를 채우면 남은 고기를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지녔다. 훈제하거나 서늘한 장소에서 말려서 나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장할 방법이 없다면 나중에 배가 고플 경우 다시 사냥에 나서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배를 곪거나 또 다른 먹이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결국 먹을 것, 다시 말해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인간이 개발하면서 만족을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린 셈이다.

올 한해 농사가 잘 되었다 하더라도 내년에 가뭄이 들 수도 있으니 다 먹지 않고 비상시에 대비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남았다고 남에게 다 주는 법은 드물다.

3 년 가뭄이 있을 수도 있고 9 년 수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3 년 농사가 잘 되어도, 나아가서 9 년 농사가 잘 되어도 저축한 식량을 다 소비하는 법은 없다.

먹을 것이 떨어진 옆 동네 사람들이 당신네 농사가 몇 년간 잘 되었으니 좀 나눠주시오 하고 와서 구걸을 하면 도리 상 약간은 줄 수 있겠지만 다 내어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바로 '위기관리'라는 개념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당초 저장기술이 없었다면 위기관리 자체도 없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그저 하늘에 달린 것이라 체념하고 받아들일 밖에.

저장기술이 있기에 사람은 야무지게 살아가는 법도 배운다. 저장할 수 없다면 여물고 단단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누구는 가르친다. 그런 삶의 자세에 공감하는 이도 상당하다.

그것은 동물처럼 오늘 먹을 것을 얻었으면 내일의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로 귀착된다. 옛날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그런 청빈의 삶을 살고자 했으며, 선승들 또한 그런 삶을 지향한다.

한 때의 히피들도 결국 그런 삶을 살고자 했었다. 사실 히피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도 있으니 바로 귀농이다. 귀농하고자 하는 자는 본질에 있어 히피인 것이다.

그런 삶을 인정한다. 하지만 영원히 소수에 머물 것이라 여긴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미 가치를 저장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의 저장은 잉여를 낳고 잉여는 풍요를 낳는다. 풍요는 문명을 일구고 우리는 그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산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다툼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덜 다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와 악으로 세상을 순화시켜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실로 탁월한 대안이다. 세상이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구조화되기 이전의 한가로운 생각이 아니다. 2 천년전 이전에도 이미 세상은 짜여질 대로 짜여져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악을 강조한 공자의 哲言(철언)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가 아닌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음식남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칼럼을 쓰지 못 한 지도 무척 시간이 흘렀다.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워낙 어지럽고 필자의 마음도 무거워 여러 번 쓰다가 그만 두었다. 나머지 두 번은 가급적 빨리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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