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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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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한윤수의 '오랑캐꽃']<20>

인간 자체는 순박한데 어지간해서는 얘기가 안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몇 나라들. 그 중에서도 키르키즈스탄 사람들은 특이하다.

알릭은 불법체류자로 충청북도 어딘가에서 일하고 돈을 못 받았다는데 그 회사의 주소는 물론 전화번호도 모른다.
"가면 알아요. 같이 가요."
하는데 바쁜 직원들이 충북까지 갈 시간이 있나?
"못 가니까 명함이라도 얻어 와요."
하면 알릭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어려운데 왜 안 도와줘요?"

키르키즈 인들은 3개월짜리 단기 비자로 입국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 중에는 합법 체류자격을 유지하기 위하여 3개월 단위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3개월을 넘겨 불법체류자로 눌러앉는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많다. 임금을 체불해도 해결할 방도가 거의 없다. 추방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는 한.

키르키즈인 4명이 임금을 받지 못했다. 쉐르조드가 4명을 대표하여 진정서를 써달라고 왔다. 3개월짜리 단기 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외국인 등록증도 없어서 진정서를 쓰려면 각각 여권 사본과 위임장 그리고 예금통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권이 있는 사람은 예금통장이 없고, 예금통장이 있는 사람은 여권이 없으며 두 개 다 있는 사람은 바쁘다고 오지 않아서 위임장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1년 3개월이 흐른 지금까지 진정서를 쓰지 못하고 있다.
아, 언제 쓰려나?

사샤는 자기 통장 하나로 자기뿐만 아니라 친구 4명의 월급을 받아 관리했다. 이른바 '종합통장'이다. 사샤는 그 통장에서 돈을 꺼내 음식도 사먹기도 하고 컴퓨터 게임도 하고 여관비도 지불하고 하여간 다용도로 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얼마를 받아 어디에다 썼는지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나눠줄 돈이 부족하자 그는 나를 찾아왔다.
"회사에서 돈 쪼금 줬어요."
그러나 내가 전화를 걸자 회사측에서는 펄쩍 뛰었다.
"돈 다 줬는데요."
"자료가 있나요?"
"그럼요."

회사에서 팩스로 보내온 서류는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20만원, 30만원씩 찔끔찔끔 지불한 게 있어서 뭔가 물어보았더니 사샤가 가불한 금액이란다.
"사샤, 회사는 잘못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사샤는 불만이 많았다.
"잘못 있어요. 회사에 가서 컴퓨터를 조사해 보면 다 나오는데."
"남의 컴퓨터를 내가 어떻게 조사해? 경찰도 못해. 영장이 없으면."
어이가 없어서 언성을 높이자 사샤는 토라져서 가버렸다.

그러나 그는 매일 아침 센터를 방문했다. 마침 러시아 어를 잘하는 L선생이 있을 때라 그는 L선생을 붙잡고 늘어졌다.

"내가 *어려운데 왜 안 도와줘요? 회사 같이 가요, 네?"
며칠 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자 그녀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되었다. 참다 못해 내가 두 팔로 엑스 자를 그어보이며 소리쳤다.
"사샤, 우리 못 도와줘. 가!"
사샤는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그 후로 사샤는 오지 않았다.

*정확한 기억 : 물론 사샤는 자기 기억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유목민은 기억이 정확한 편이다. 하지만 정확한 편일 뿐이지,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니까!

*내가 어려운데 : 유목민들은 이웃이 어려울 때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가령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도 이웃이 돕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서로 돕는 것은 일종의 품앗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래서 "내가 어려운데 왜 돕지 않느냐?"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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