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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만들어진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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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만들어진 자연'

[권혁태의 '일본읽기']〈24〉 '신이 만든 산 신이 만든 일본인'

규슈 같은 남부지역에서 도쿄로 가는 일본의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대체로 태평양 쪽의 연안으로 비행하게 되는데, 도쿄의 하네다 공항을 가까이 둔 시즈오카 부근에 오게 되면, 맑은 날에는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지금 승객 여러분의 왼쪽에 후지산이 보입니다". 이 소리가 들리자마자 승객들은 조그마한 창가로 후지산을 보기 위해 모두 고개를 왼 쪽으로 튼다.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후지산의 자태가 나타난다.
▲ 벚꽃 뒤에 보이는 후지산의 모습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은 후지산(富士山)이다. 높이 3,776m. 일본의 시즈오카 현과 야마나시 현에 위치해있다. 옛 이름이 후지산(不二山)이니,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산이라는 뜻일 게다. 다른 산줄기와 동떨어져 바다 쪽으로 불현듯 솟아올라 있다. 높은 산 들이 다 그렇듯이 후지산도 예로부터 영산으로 불려왔고 특히 근대 이후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상물로 자리 잡았다.

후지가 붙는 지명은 후지산 근린 지역뿐만 아니라 후지산이 육안으로 보일 리 없는 규슈지역이나 홋카이도 지역에서도 발견될 정도이다. 연간 약 20만 명의 관광객이 후지산을 찾고 있으며, 이 중 약 20%는 외국인이다. 2001년에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가 '21세기에 남겨주고 싶은 일본의 풍경'을 시청자를 대상으로 모집한 결과, 총 응모자수 39만 표 중 약 3만 7천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것이 후지산이었다.

이렇게 보면, 후지산은 그저 일본에서 사랑받고 있는 대표적인 명산일 뿐이다. 산을 산이 가진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웅장함으로 표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후지산을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 받들면 받들수록 불편해진다. 이런 경우에는 후지산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입에 올리는 자연은 이미 자연 그 자체가 아닐 지도 모른다.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던 릿프맨(Walter Lippmann)이 "우리들은 대체로 보고나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내리고 나서 본다"고 말했듯이, 후지산은 일본 사회에서 내려진 '정의', 특히 근현대 이후 일본 사회에서 형용되기 시작한 일본 민족의 상징물이라는 정의를 통해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온다.

재일조선인 소설가로 아쿠타가와(芥川)상 수상자인 이양지(李良枝, 1955-1992)는 에세이 <후지산>(198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후지산을 미워해왔다. 유아기를 지냈을 무렵부터 집 2층에서 보이는 후지, 학교 창문에서 보이는 후지, 언제나 나에게 무언가를 들이대고 조금씩 다가오는 후지를 미워했다(…)왜 숨 쉬고 있는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의 삶, 그리고 타인의 삶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 채로 이 세상을 증오했다. 아름답고 당당한 꿈쩍도 하지 않는 후지산이 미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양지가 태어난 곳은 야마나시 현 미나미쓰루(南都留)이다. 후지산 바로 밑이다. 이양지는 어렸을 때 부모가 일본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일본인'이 되었다. 그녀의 일본이름은 '다나카 요시에(田中淑枝)'이다. 다나카 요시에와 이양지 사이의 정체성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식민지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는 후지산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혹은 웅장하면 웅장할수록 마치 자신이 다나카 요시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후지산을 거부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유학했지만 다나카 요시에와 이양지 사이의 갈등은 그녀를 평생 괴롭혔다. 그녀는 <나비 타령>이라는 작품에서도 "만일 (자동차) 핸들을 옆으로 확 꺽어버리면.....나도, 후지산도 없어질까?"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후지산은 역사와 분리될 수 있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일본 그 자체였고, 그 일본이란 식민지주의였으며 전후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요괴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고통은 후지산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내셔날리즘 그 자체였다.

사실 후지산이 그 자체로 일본 내셔날리즘의 상징물로 언제부터 표상(representation)되게 되었는가는 분명치 않다. 지금도 동네 공중목욕탕에 가게 되면, 후지산이 그려져 있는 욕탕 벽화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욕탕 벽화에 후지산이 그려지게 된 것이 1910년대부터라는 기록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주로 남탕에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후지산이 웅장함, 용맹스러움 등의 남성성의 상징으로 형용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부국강병 노선을 치달았던 제국 일본과 매우 친화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시점을 전후해서 사용되기 시작한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인 <소학창가(小学唱歌)>에는 "후지의 높고 높은 봉우리, 해 뜨는 나라(=일본)에 그 모습"이라는 노래 가사가 등장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융성을 후지산의 높이에 투영시키고 있다. 1930년의 <소학창가>에도 "예로부터 구름 위의 구름을 넘어서는 후지산. 수 천만 국민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신(神)의 산"이라는 노래가사와 함께, '후지산은 모든 국민이 숭경(崇敬)하여야 한다'는 주가 붙어 있다. 다시 말하면 후지산은 신의 산이고,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일본 국민이니 후지산은 일본 국민 그 자체라는 논리이다.

후지산으로 형용되는 일본의 자연을 내셔날리즘적인 코드로 해석해 이를 이론화시킨 사람은 시가 시게다카(志賀重昴, 1863-1927)이다. 일본의 인문지리학의 창시자이며, 스포츠 혹은 여가선용으로서의 근대적(서양적) 등산론을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청일전쟁 기에 저술한 <일본풍경론>을 통해 일본의 풍경이 뛰어난 것은 기후와 해류가 다양한데다 변화무쌍하며, 수증기와 화산암이 많고, 강물의 흐름이 격렬하다는 점을 들어 이는 다른 나라에 없는 특수한 독자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지리는 화산이 많아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매우 역동적인 경관을 자랑하며, 이 명산 중의 명산에 후지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뛰어난 것은 일본인이 뛰어가기 때문이고, 일본인이 뛰어난 것은 일본의 자연이 뛰어나기 때문'이며, 그 뛰어난 자연의 정점에 후지산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후지산은 이미 산이 아니라 '만들어진 산'이며 '만들어진 자연'인 셈이다.

따라서 후지산은 근대 일본의 국민 통합 과정 그 자체를 상징한다. '도코로 후지'라는 말이 있다. 굳이 번역하자면 '지역 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 후지'라고도, '고향 후지'라고도 한다. 후지산을 본떠 각 지역에 있는 명산에 후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일본 전국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중에 39개 도도부현에 '지방 후지'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도쿄 북쪽에 위치한 사이타마(埼玉) 현 도코로자와(所沢) 시에 아라하타 후지(荒幡富士)가 있다. 표고 119m에 불과한 인공 산이다. 100명 정도의 촌민이 살고 있었던 이 마을에 1985년부터 약 16년에 걸쳐 연 1만 명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만든 인공산이 바로 아라하타 후지이다. 그리고 이곳에 신사를 만들었고 주변에 산재해있던 작은 신사들을 관할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작은 토속신앙은 '말살'되었다. 이유는 촌민들의 통합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지산이 일본 국민의 통합의 기능을 했던 것처럼 아라하타 후지는 아라하타 마을을 통합한 것이다. 후지라는 이름은 이렇게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후지산은 일본 '통합'의 상징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통합'이란 '제국 일본'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통합'에 대한 소박한 거부가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배제 시스템의 시험지가 되기도 한다.

물론 내셔널리즘=후지산이라는 표상방식에 대해서 거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산시로(三四郎)>(1908)에서 러일전쟁 이후에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는 후지산=내셔날리즘을 도쿄에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난 다른 승객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이겨도 소용없다니까요(…)당신은 도쿄에 가 본적이 없으니, 후지산을 본 적이 없지요? 곧 보일 테니까 잘 보세요. 후지산은 일본 제일의 명물이지요. 후지산 말고는 외국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후지산은 예로부터 자연 속에 있었던 것이니 그걸 자랑해도 자랑이 안 되지요. 우리들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 일본의 근대가 성취한 문명의 '보잘 것 없음'을 서양과의 비교를 통해 토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후지산의 '뛰어남'을 서양에 일본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일본 문명의 '보잘 것 없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도쿄에서 재회한 이 승객은 "자연을 번역하면 모두 인간으로 둔갑해버리니 이게 재미있는 일이지. 숭고함, 위대함, 웅장함 등. 모두 인격상의 말이 되어 버리지. 인격상의 말로 번역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는 자연은 조금도 인격상의 감동을 주지 않지". 그는 자연을 인격상의 말로 번역해서 '자랑'하는 일본 사회를 꼬집고 있는 듯하다.

후지산을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 인격화된 말로 번역하는 근현대의 일본에 자각적으로 비판적이었던 화가 중에 원폭 화가로 유명한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1901-1995)가 있다. 그는 1954년에 발생했던 비키니 섬 핵실험으로 피폭당한 다이고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라는 참치 잡이 배를 소재로 그린 <야이즈>(焼津, 1955)라는 그림에서 원래 있었던 후지산을 완성작품에서 삭제 수정한다. 그 이유를 마루키 이리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왼쪽 화면 사람들은 분노에 찬 눈으로 비키니 섬을 쳐다보면서 슬픔과 불안의 심정으로 다이고후쿠류마루를 기다리는 군상들의 모습들입니다. 오른 쪽 화면의 반은 후지산을 그리고 반은 태평양 바다를 그렸지요. (그림 속의)후지산을 쳐다보고 있자니 영 마음이 불편했어요. 일본의 산, 후지산이 우리(=일본) 민족의 자랑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아름다운 산인데 묘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히노마루(=일장기)나 천황과 마찬가지로 후지산을 내걸고 침략전쟁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학살 하면서 후지산을 찬미했어요. 산에는 죄가 없지만요. 나중에 후지를 지우고 그 자리에 후쿠류마루를 그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자연'으로 존재할 뿐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ls Wilde, 1854-1900)가 "예술은 결코 자연의 모방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이 예술의 모방이다. 도대체 자연이란 무엇일까? 자연은 우리를 낳은 거대한 어머니가 아니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만든 것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안개가 보이지만 그것은 안개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나 화가가 그 효과가 지닌 신비적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후지산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후지산을 만들어낸 일본의 근현대 때문인 것이다.

이양지가 말년에 고향인 후지산 산자락에 돌아가서 "후지산은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산맥을 보고 평상심으로 솔직하게 아름답다고 중얼거렸다"고 말하며, 일본=후지산과의 '타협'을 시도하는 것을 두고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산에 불과한 후지산에 '일본'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일본의 국가주의이다. 이양지가 (후지산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식민지주의가 재일조선인에게 계속 가해온 폭력의 결과이다. 후지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것이야말로 재일조선인의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후지산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만들기 위한 NPO 법인 '후지산을 세계유산으로 하는 국민회의(
National Council on Mt. Fuji World Heritage)라는 단체가 있다. 2011년에 후지산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결성된 이 단체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수상이 회장으로 참여하는 등, 보수적인 유명인사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후지산이 '제국 일본'의 형성과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성찰적 고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후지산을 역사나 사회와 분리된 자연 그 자체로 보게 되었다는 이양지의 전회(轉回)보다도 서경식의 '계속되는 거부'가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여전히, 그리고 계속해서 후지산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徐京植「ソウルで『由熙』を読む」、『社会文学』2007年、26号、日本社会文学会.
小沢節子『「原爆の図」』、岩波書店、2002年。
諏訪彰『富士山-その自然のすべて』同文書院、1992年。
志賀重昴『日本風景論』岩波書店、199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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