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혹을 이해하려면 기축통화의 '시뇨리지(seigniorage) 효과'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자국의 통화가 세계 기축 통화일 경우, 그것도 '금융의 세계화'가 이뤄진 현재 어떠한 이득을 누릴 수 있을까. 통상 통화량이 늘어나면 그 화폐는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정상인데, 미국은 왜 계속 통화량을 늘려 왔을까.
달러를 많이 찍어낼 경우 미국은 어떤 이득을 누리고, 반대로 다른 나라들은 어떤 피해를 입는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정부나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시뇨리지라고 한다. 원래 시뇨리지는 실질적인 가치가 액면가에 미치지 못하는 재료로 만든 '화폐주조차익'을 뜻한다. 봉건 시대에 영주(seignoir)가 이런 식으로 남발한 통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예 발행비용이 사실상 거의 없는 화폐를 강제 유통하기로 했다면, 이 화폐의 시뇨리지 효과는 천문학적인 것이 된다.
세계 기축통화가 누리는 가공할 '시뇨리지 효과'
금본위제처럼 통화량에 해당하는 만큼 실질적인 가치와 등가 교환이 가능한 체제가 아니라면 무분별한 통화량 남발은 사실상 '위조지폐'에 가까운 폐해를 가져올 위험이 있으며, 발행자에게는 그만큼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게 된다. 북한을 '위조지폐 제조국'이라고 미국이 맹비난할 때 정작 미국이야말로 '위조지폐 대국'이라는 비아냥이 떠돈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통화량을 두 배로 늘릴 경우 국내에서만 유통된다는 가정을 하면 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 대신 화폐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진다.
결국 금융자산의 절반을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가는 효과가 나기 때문에 '시뇨리지 효과'를 '인플레이션 세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제 금융결제의 기축통화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 달러화의 경우는 이런 효과가 '세계화'된다. 다른 나라들이 갖고 있는 달러 자산은 실질 가치가 달러 통화량이 늘어나는 만큼 감소하면, 그만큼의 가치를 미국이 가져가는 것이 된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달러는 금본위체제 하에서 국제 기축통화로 결정됐다. 하지만 1971년 당시 베트남 전쟁 등으로 국제수지 적자가 급증하면서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다른 나라들이 금태환을 요구하자 일방적으로 금태환제를 폐지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것이다. 이후 미국이 국제적으로 챙긴 시뇨리지 효과는 천문학적인 것으로 추산된다.
'금본위제'가 폐지된 기축통화국이 누리는 커다란 이득 중의 하나는 바로 '외환위기'라는 게 근본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그냥 찍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매년 천문학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내면서도 미국은 외환위기 걱정이 없이 '흥청망청' 살아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문제는 이처럼 달러를 마구 남발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나라의 부를 공짜로 가져간다는 것이며, 금융의 세계화는 이런 달러로 세계 곳곳에 거품을 만들어서 결국에는 거덜내는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달러의 지배적 지위로 세계의 부를 착취"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24일 논평에서 "음울한 (금융위기) 현실 속에 사람들은 미국이 달러화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해 세계의 부를 착취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이제 세계는 국제경제에서 미국이 점해온 지배적 지위화 달러화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때문이다.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더 이상 달러 가치로 인한 손해를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겠다는 반발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국으로의 달러 자본 유입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지역별로 달러를 배제한 통화스왑이나 화폐동맹이 결성되고 있다.
바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외환보유국 세계 1위인 중국(1조9000억달러), 3위인 러시아(5000억달러)는 지난 28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중·러 양국 교역에서 달러 대신 위안과 루블화를 사용해 결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 '탈달러 운동'은 갈수록 구체화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볼리비아·베네수엘라 등 12개 회원국을 가진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정부 대표들은 지난 27일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긴급 확대회의를 열어, 회원국간 무역거래에서 달러화 사용을 줄이고 자국 통화 사용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이미 이달부터 양국간 무역거래에서 달러화 대신 상호 자국통화 사용을 늘려가는 합의를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국제무역에서 달러 결제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미국 국채를 앞다퉈 매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하루아침에 달러 체제는 붕괴된다. 이러한 사태는 미국의 정권이 바뀌는 차원을 넘어서 용납할 수 없는 사태다. 지금도 미국은 하루에 수십억 달러씩 달러 자본이 들어오지 않으면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정한 배후는 '달러 거품 붕괴'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근본적으로 달러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자산 거품을 일으켜 놓은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는 미증유의 경제위기로 진단되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 거품 붕괴'의 진정한 대상은 바로 '달러 거품 붕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결국 달러는 장기적으로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은 선택은 시간을 좀 더 끌기 위한 '버티기' 뿐이다. 지난해말 2개국에 불과했던 미국의 통화스왑 대상국에 지난 9월 중순 이후 순식간에 12개국이 추가된 배경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한국은 지난 30일 이 대열에 막차를 탄 4개국 중 하나다.
한국 정부도 밝히고 있다시피, 통화스왑은 달러가 실제로 부족할 경우 끌어다쓸 수 있다는 것이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원화를 담보로 빌려 쓴다지만 공짜도 아니다. 3% 정도의 금리가 붙는다. 일각에서는 이번 통화스왑 체결에 '비밀 계약'이 따라 붙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달러 통화스왑 동맹'에 가담하면서 '달러 패망'의 길에 한국도 동참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달러 패권 지키기'에 한국 등 여러나라를 '공범'으로 끌어들인 것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미국의 달러가 금세 붕괴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제국의 면모'를 잃게 되고, 달러 가치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다.
이번 금융위기를 또다시 막대한 달러를 찍어내 '달러 우산 동맹'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뿌려대서 넘긴다면, 결국 또 한번의 거품이 일어나고 또 다시 붕괴하는 식으로 '달러 패권'의 질긴 목숨이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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