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없는 표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근대 이후, 아시아에서 자행되었던 수많은 전쟁의 주범이 일본이었고, 더구나 그 전쟁 행위에 대해서 '반성'을 하고 있지 않은 현대 일본에 '평화'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냐는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반발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을 드러내는 '열쇠말'은 여전히 '평화'이다. 물론 일본 사회에서 말하는 '평화'가 peace와 같은 의미인지, 그리고 평화라는 말의 일본어 발음인 '헤이와'(HEIWA)가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평화'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천착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일본에는 '평화'가 넘친다. 물론 그건 평화와도 다르고 peace와 다른 '헤이와'이다. 이 경우 '헤이와'는 이미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특히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가면 '헤이와'가 넘친다. 공원 이름부터 길거리 이름, 지명, 그리고 심지어 회사 이름, 병원 이름 등에도 '헤이와'가 넘친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민통합의 '표상'으로 후지산(富士山)이 자리 잡으면서 '후지'라는 이름이 전국 각지에 지명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헤이와'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가장 인기를 끌게 된 유행어이다.
현대 일본을 '평화'라는 말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평화가 일단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면, 현대 일본은 항상 '전쟁 상태'였던 전전의 일본과는 달리 '전쟁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패전'의 충격으로 많은 일본인이 할복자살하거나 혹은 울음을 터트렸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적지 않지만, 이와 동시에 이제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되어 안심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적지 않다. 공습경보에 놀라 방공호로 도망치지 않아도 되고, 군대에 끌려가서 죽지 않아도 되며, 일상에서 반복되는 군사훈련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왔다는 데서 오는 안심감이 항복 선언을 들은 많은 일본인들의 솔직함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안심감을 '평화'라고 한다면, 그 때부터 시작된 '일상의 평화'라는 것은 평화를 지탱하는 조건이 무엇이든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가 패전 후 '새로운 일본'의 이정표가 된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문화국가'라는 말과 함께 '평화 애호 국민'. 혹은 '평화국가'라는 말이 패전 직후 일본 사회를 뒤덮은 것은 그 증거이다.
담배 'PEACE"의 유래
지금도 일본의 애연가들한테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PEACE'라는 담배의 유래를 살펴보면 패전 직후의 사회상이 떠오른다.
패전 직후, 그 혼란스럽던 환경 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복권을 발매한다. 전쟁 중에도 복권 사업이 계속되었다고 하니, 전쟁이 끝난 후에 복권이 발매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궁핍, 우울 등의 어두운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는 전쟁 중과 패전 직후를 생각해보면 다소 의외일 수도 있겠다.
1945년 8월 15일은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복권 당첨 발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패전 후 다시 복권이 발매된 날은 1945년 10월 29일. 패전 후 겨우 두 달 남짓이다. 장당 가격은 10엔이고 1등 당첨 액은 무려 10만 엔이다. 당시 물가 수준으로 보면 꽤 높은 가격이다. 그런데도 모두 860만장이 팔렸다니,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첨 발표 후, 소위 '꽝'인 복권에 대해서는 담배 10개비를 교환해주었다는 것이다. 아마 복권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부가상품'이었을 것이다. 이 '부가상품'으로 교환되는 담배의 이름을 일반 공모로 모집한다. 공모 이름 발표는 11월 23일. 이름 부분에서는 1등이 'PEACE', 2등은 '사자나미'와 '이코이'. 도안 공모 1등은 'New World', 2등이 'PEACE'. 최종적으로는 "PEACE"가 선정된다. 그리고 1946년 1월 10일에 'PEACE'가 발매된다. 낮은 파도를 뜻하는 '사자나미'나 '휴식'을 뜻하는 '이코이', 'New World', 평화를 뜻하는 "PEACE"라는 이름을 보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전쟁 중에 인기를 끌었던 담배는 '긴시(金鵄)'와 '호우요쿠(鵬翼)'이다. '긴시'는 원래 일본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솔개의 이름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아 천황의 군대를 도왔다는 전설의 새이다. 전쟁 중에는 주로 무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되는 훈장을 '긴시 훈장'이라 했으니 '긴시'라는 이름은 군국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한 이름이다. '호우요쿠'는 전투기의 날개를 뜻한다. '긴시', '호우요코'에서 'PECAE'으로의 전환, 이것이 전전과 전후를 구분 짓는 상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평화의 양의성과 '회한공동체'
하지만 '평화'라는 말에는 이중성, 혹은 양의성이 존재한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라는 라틴어 격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평화가 반드시 무장, 혹은 군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에 세계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보면, 침략국조차도 "전쟁을 위해서 전쟁을 시작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모두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말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청일전쟁(1894년)을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라 말했다. 후에 반전론자로 전환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도 청일전쟁을 '야만'과 '문명' 간의 대립이며,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또 가쓰라 타로(桂太郎) 수상은 러일전쟁을 '일본 제국의 안전과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자리매김한다. 1931년 '만주' 침략 이후에도 일본이 전쟁의 언설로 줄곧 사용한 것은 '평화'라는 말이다. 따라서 '평화'라는 말이 반드시 무장이나 전쟁을 완전 부정하는 언설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일본에서 등장한 평화라는 말은 이같은 '무장 평화'와는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비무장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의 양의성이란 굳이 말하자면 '무장 평화'와 '비무장 평화'의 두 가지 뜻인 것이다. '무장 평화'가 평화를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3000만 명의 일본인과 2000만 명의 아시아 사람들의 죽음을 가져다주었으니, '무장평화'가 '비무장 평화'로 전환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2000만 명의 아시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있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1914-1996)가 패전 후 일본 지식인의 공통된 정서를 '전쟁을 저지하기는커녕, 전쟁에 협력하게 된 지식인들의 후회'라 하고, 이를 '회한 공동체'라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회한공동체'야말로 전후 일본의 '비무장평화'의 정서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심리적 상태가 결과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전향을 거부하면서 '옥중 18년'을 관철한 공산당 등의 좌파에 대한 경외로 이어진다. 일본 공산당을 비롯한 일본의 좌파세력이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군정기의 좌파 정당 합법화라는 조건과 함께 '회한 공동체'에 바탕을 둔 일본 지식인 사회의 '좌파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좌파세력이 외교 안보노선에서 보수정당과 '타협 없는 차별성'을 고집하고 비무장을 규정한 평화헌법을 금과옥조처럼 여긴 것도 또한 이 때문이다.
국가 불신과 '평화'
일본을 대표하는 평화학자인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1927- )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는 기민체험입니다. 1945년 가을에 징병 연령에 달한 나는 다가오는 본토 결전을 맞이해 적의 전차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자폭/옥쇄할 각오를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전이 되고, 나의 죽음이 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사석(捨石)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나니, 이번에는 굶주린 서민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조차 국가는 보장해주지 않았고 나 자신도 텃밭을 가꾸어 뜻하지 않게 농민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전쟁을 강행한 국가는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민(民)을 버렸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가는 것이 자신의 존재이유라고 믿고 있거나, 믿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나는 이 같은 국가의 배신과 붕괴에 의해, 그 때는 '허탈'이라 불리던 목적 상실 상태에 빠져 있었지요. 당시에는 아직 잘 알지 못했습니다만, 전쟁 중에 대본영(大本營)이 오키나와를 포함한 태평양의 섬에서 '옥쇄'라고 부른 것은 병사나 서민을 '기민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었고, 실제로 공습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민'을 눈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체험에서 태어난 것이 국가권력에 대한, 또는 그 허망한 신화를 조작해 민을 기만한 지배층에 대한, 골수에 사무친 불신입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국가가 아니라 자신이 정한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의 결의였습니다. 그것은 민의 자기결정에 입각하지 않고 민을 사석으로 삼은 국가권력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거절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전후 원점이었습니다."
또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인 히다카 로쿠로(日高六郎, 1916- )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일본제국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붕괴했다. 국가는 민중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가장 권력적인 명령자인 동시에 민중의 생활에 대한 최대의 비호자였지만, 이 두 가지 모두를 잃었다. 민중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해서 자신의 생활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민중은 '개인주의'를, 이념으로 배우기 전에 현실생활상에서 '개인주의자'가 될 것을 강요받은 것이다. 전후의 '개(個)'의 해방을 생각할 때 정부(正負)를 포함해서 이 사정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헌법이 비록 미국 주도하에 제정되었지만 이것이 개정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국가 혐오와 염전 의식이라는 전후의 평화지향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상의 평화' 혹은 '개인의 평화'를 뜻하는 '평화적 생존권'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평화지향성이 명확한 가해자의식에 대한 성찰적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이와 같은 평화 지향적 의식은 고도성장 이후 내셔널리즘의 고양이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국가라는 틀 속에 다시 용해되면서 변질해가는 과정을 겪게 되고, 특히 전쟁 체험 세대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전쟁 체험도 국가 대 개인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라는 틀로 재해석되는 과정 속에서 우경화 노선이 등장하게 된다. '무장 평화'가 '비무장 평화'로 전환한 것이 패전 직후이고 이것이 전후 60년을 지탱해왔다고 한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비무장 평화'가 '무장 평화'로 다시 전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坂本義和「憲法をめぐる二重基準を超えて」『世界』2005年 9月号, 岩波書店.
日高六郎「戦後日本における社会と個人」『岩波講座 哲学5』岩波書店, 1966年.
半藤一利『昭和史-戦後編1945-1989』平凡社, 2006年.
권혁태, 「일본 진보진영의 몰락」『황해문화』200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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