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 결과를 가장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한 가지 변수를 고르라면 많은 학자들이 지난 4년간의 1인당 소득 성장률을 택할 것이다. 이 한 변수의 예측률이 90%를 넘는다. 어느 당 후보가 승리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몇 퍼센트를 득표할 것인가 까지도 지난 4년 간 다수 대중의 경제적 처지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알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많은 호사가들이 잘못된 예측을 했던 지난 2004년의 선거도 이 모델을 적용하면 부시가 존 케리를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
일반적 추측과 달리 작년까지의 부시 2기(2004~07년)의 1인당 소득 성장률만 가지고 선거 결과를 예측한다면 오히려 존 멕케인의 근소한 승리가 점쳐진다. 작년까지 부시 행정부의 경제지표는 클린턴 시절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경제야'라고 외칠 상황은 아니었다. (비록 거기에 거품이 끼어있다 할지라도)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가 앞서는 이유는 온전히 최근의 금융위기 때문인가? 금융위기만 없었다면 매케인이 승리할까?
양 당의 전당대회 이후 여론조사 결과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매케인에게 뒤지던 오바마의 지지율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이후 역전해 최근 5개 여론조사의 평균은 7%포인트 이상 앞서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가 앞서는 이유는 금융위기라는 외부적 충격 이전에 이미 미국인의 여론이 밑바닥에서부터 변화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미국 여론 : 경제, 그리고 정부의 역할
부시 행정부 시절 그리 나쁘지 않았던 성장률이, 금융위기 훨씬 이전에도 매케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창출된 부가 소수 상위 계층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로는 평균 소득 성장률이 다수 대중의 경제 상황 변화를 제대로 나타내주지 못한다.
1980년대부터 소득 불평등이 꾸준히 상승해, 2000년 이후 미국에서 새로 생산되는 부의 45%를 상위 10%의 계층이 가져가고 있다. 1970년대와 비교해 볼 때 불평등이 50%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는 대공황 당시의 부의 불평등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불어 정부의 역할에 대한 여론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부시 시대의 미국 정치를 상징하는 두 사건을 들자면, 하나는 9.11 테러이고 다른 하나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일 것이다. 전자는 국가안보, 후자는 경제와 그에 대한 정부의 역할에 대한 사건이다. 카트라나로 인해 뉴올리언스가 물에 잠기고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구호를 기다리며 끔찍한 나날을 보냈던 장면은 미국인들에게 뭔가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90년대 후반에는 정부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32%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미국인의 41%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카트리나 직후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는 여론이 38%에서 45%로 급증했었다. 정부의 역할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여론은 대선전이 본격화되기 오래 전에 싹텄다. 현재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유권자는 9%에 불과하다.
이번 대선의 경제 이슈가 클린턴 선거 운동 시절의 경제 이슈와 다른 점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양 당의 이념적 충돌이 선거운동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오바마가 유래없이 긴 2분간의 광고(보통은 30초)를 통해 매케인과 신자유주의 경제 철학, 적하이론(trickle down theory)에 대해 비판하고, 중산층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역설한 것은 상징적이다.
큰 기조는 전임자와 변함없이 유지하되 미세조정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했던 클린턴식 경제 변화가 아닌, 비록 구체적인 정책은 알 수 없지만 거시조정을 통해 경제구조의 변화를 시도하는 레이건식 변화를 유권자들이 요구하고 있다. 클린턴에 대한 민주당원들의 진한 향수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 지명된 이유는 그처럼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는 다수 대중의 욕구의 반영이다.
오바마가 TV 토론에서 "근본적 차이"라는 말을 남발하다시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바마의 우세는 금융위기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에 생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불만이 장기간 누적된 결과이다.
월스트리트발(發) 금융위기는 이러한 여론 동향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개입해 갑부들도 살리는데, 왜 일반 서민은 그냥 내버려두느냐고 묻고 있다. 2004년 선거에서 53%의 유권자들이 외교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으나, 올해는 69%가 경제 이슈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제 상황에 대해 80%가 부정적이다. 현재의 월스트리트의 위기에 대해서는 56%의 미국인이 분노하고 있다. 81%의 미국인이 경제구조 계획에 포함된 기업 경영진의 임금을 제한해야 하고, 80%의 미국인은 주택자금을 융자한 일반 대중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하고 있다.
부유층의 세금을 올리고 의료보험을 확충하는 등 중산층을 돕겠다는 오바마의 계획과 대중의 의견은 일치한다. 경제를 잘 다룰 것 같은 후보로 절대 다수가 오바마를 꼽았다. 두 차례 토론 후 오바마의 외교 능력에 대한 이미지도 개선되었다. 경제 이슈가 선거의 전면에 등장하고, 다수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현 상황은 변화를 모토로 내세운 오바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매케인의 마지막 돌파구 : 정체성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인은 '정체성' 문제이다.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흑인인 민주당의 브래들리가 낙승을 거둘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예측되었지만, 결과는 상대방 백인 공화당 후보의 승리였다. 여론조사가 보기 좋게 빗나간 이유는, 민주당원들이 인종문제에 대해 초월해야 한다는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대답'을 여론조사에서 했지만, 실제 투표에서는 백인 후보에게 표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여러 선거에서도 흑인 후보의 득표율은 여론조사 보다 낮았다. 이 현상을 일컬어 브래들리 효과라 한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14%가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믿고 있고, 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은 50%를 넘는다. 오바마의 종교에 대한 의문은 그의 인종에 대한 불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다양성에 대한 개방된 태도는 주로 대학에서 인종적·계급적 배경이 다른 친구들을 사귀면서 가지게 된다. 이런 기회를 가진 화이트칼라 계층보다는 그러지 못한 노동자 계층에서 오바마의 정체성에 의심을 품는 경향이 강하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노동자 계층이 이탈한다면 오바마에게 타격이 크다.
기왕이면 같은 인종을 선호하고, 다른 인종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주입된 편견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유사한 집단을 좋아하는 인간 본능의 반영이기도 하다. 인간은 별도의 사회적 학습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질성보다는 유사성을 택한다.
부시가 지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은 그의 선거전략가인 칼 로브가 종교 운동을 잘 조직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모든 사람들의 비판을 받지만, 실제로는 강한 대중적 파급력을 가지듯, 미국의 인종 문제도 그 잠재적 파괴력이 크다.
인종과 종교라는 정체성 이슈는 매스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공개된 선거운동이 아니라 구전 효과가 큰 조직 선거 운동이다. 미국에서 보수 교회는 가장 잘 조직된 집단이다. 흑인 대통령에 대한 백인 유권자의 막연한 심리적 두려움과 오바마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이 어떤 우연적 사건과 겹칠 경우 매케인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실낱같은' 이유는 우연적 사건의 확률이 낮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첫째, 미국에서 인종의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많은 연구들이 인종보다는 계급의 중요성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공화당의 종교 조직에 맞서 민주당의 풀뿌리 조직이 대폭 강화되었다. 민주당원을 자처하는 유권자 수가 폭증한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셋째, 공화당의 인신공격적 선거전술을 여러 번 경험한 민주당이 이번에는 순순히 당하지 않고 난타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다.
넷째, 역사적으로 막판 역전에 성공한 경우는 중심 이슈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1976년 선거에서 제럴드 포드가 막판에 카터를 거의 따라잡았으나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고, 2004년 선거에서 케리가 외교 안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부시를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 두 경우 모두 핵심 이슈에서 상대방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반면 이란 인질극 이슈가 지배했던 1980년 선거에서 레이건은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고, 2000년 선거에서도 비록 투표인단 수에서는 밀렸지만 앨 고어가 마지막 2주 동안 판세를 뒤집어 과반수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매케인이 제기하고 있는 오바마의 정체성 문제가 지지율 격차를 줄일 가능성은 높으나, 경제 이슈가 가장 중요한 선거에서 대세를 역전시키기에 충분할지는 의심스럽다.
여성 유권자도 미국인이다
그렇다면 새라 페일린이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온 이 번 선거에서 여성은 독자적 계층으로 의미 있게 작용하고 있는가? 역대 미국 대선을 통틀어 여성표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적은 단 한 번 밖에 없다. 여성 투표 전체를 대선에서 제거해도 선거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는 한 국가의 방향성에 대한 투표이지, 여성의 특수 이익에 관련된 투표가 아니다.
인종과 경제, 계급 문제는 교차점이 크지만, 여성과 계급 문제의 교차점은 상대적으로 작다. 부유층의 절반은 여성이고, 빈곤층의 절반도 여성이다.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선호하던 여성이, 부통령 후보가 여성이 되었다는 이유로 정책적 선호를 바꿀 가능성은 낮다. 여성만의 경제적 이슈, 사회적 이슈가 분명 있지만, 대통령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종합적 판단에서 그 이슈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여성이 부통령 후보로 선정된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페일린 선정 이후 여성 표심의 변화는 없다. 오히려 페일린 선정 직후 여성들의 민주당 지지율이 2%포인트 더 늘었다. 공화당 전당 대회 이후의 매케인-페일린 티켓의 지지도 상승은 페일린의 보수적 사회 가치에 이끌려 전통적 보수층이 결집한 결과지, 페일린이 여성표를 끌어왔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은 외교나 군사 문제보다 경제, 사회보장 이슈에 더 민감하다. 페일린의 5자녀와 하키맘은 설득력이 있지만, 그의 정책은 그렇지 않다. 남성의 41%만이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할 때도, 여성은 55%가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했다. 여성들이 자신의 정책적 판단은 뒤로 제쳐두고 페일린의 이미지에 이끌려 남성 유권자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여성에 대한 편견의 산물이다.
부동층은 없다
투표는 여론조사와 달리 적극적인 의사표현 '행위'이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지지할 후보를 결정할 수 있는 유권자들이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즉, 선거를 3주도 남겨놓지 않은 현 시점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부동층이 선거 결과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유권자의 표는 이미 결정한 유권자와 동일한 분포를 보이거나 두 후보로 공평하게 분산될 것이다. 어떤 경우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혹자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여론조사에 더 잘 응하기 때문에 공화당에게 숨은 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집전화로 응답자를 찾는 여론조사는 휴대폰만 사용하는 오히려 다수의 젊은층을 놓치고 있다. 집전화 없이 휴대폰만 사용하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더 '리버럴'하다는 것은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앞으로 선거 판도가 바뀐다면 그것은 부동층 때문이 아니라 이미 지지할 후보를 결정했던 유권자들이 지지 후보를 바꿀 강력한 충격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외부적 사건이 있고, 인종 편견의 뿌리가 여러 여론조사와 사회과학 연구에서 드러났던 것 보다 훨씬 깊다면, 매케인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미국 사회는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회복하기 힘든 격심한 사회 통합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힐러리 클린턴 선거전략가였던 하워드 월프슨,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 등은 일찌감치 '게임오버'를 천명했다. 선거 결과보다 이 번 선거가 과연 얼마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지에 더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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