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임기가 4개월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 시기에 핵 합의 이행을 진척시켜야 할지 말지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고민이 절정에 다다른 모습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요구에 의해 판문점에서 6자회담 경제에너지 지원 관련 남북 실무협의가 열린 19일, 평양에서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불능화했던 영변 핵시설을 원상으로 복구한다고 확인했다.
남북 실무협의에서 수석대표를 통해 현재 교착의 책임이 왜 미국이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반면, 불능화 원상복구 조치로 전형적인 '벼랑끝전술'을 펴는 북한의 모순적인 태도는 북한 지도부의 현재 고민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北외무성, 불능화 시설 원상복구 첫 확인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의에 답하는 형식으로 미국이 자신들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를 발효시키지 않는 것을 비난하며 "영변 핵시설들을 원상복구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앞서 북한은 지난달 26일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을 이유로 불능화 중단을 선언하며 원상복구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북한이 원상복구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외신 보도가 잇달았으나, 북한 당국이 이를 직접 확인해준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안 시키는 것은 "우리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진의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며 "미국의 본성이 다시금 명백해진 이상 우리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으며 우리대로 나가면 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특히 미국이 요구하는 '국제적 기준'의 핵 검증 문제와 관련,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성원국도 아닌 우리에게 '국제적 기준'의 미명하에 가택수색을 강요해보려는 미국의 기도는 언제가도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허황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는 '국제적 기준'에 따르는 신고서 검증이 합의돼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가 효력을 발생하게 돼 있다는 미국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모든 합의를 전면 왜곡하는 궤변"이라며 "6자나 조미(북미) 사이에 문건상으로는 물론 구두로도 이에 대해 합의된 것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외무성 대변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핵 신고를 하면 미국이 테러지원국을 해제하기로 했다. 그래서 신고를 했더니 미국은 그 내용을 검증하는 체제를 먼저 만들어야 테러지원국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새로운 조건을 끼워 넣은 것으로 합의 위반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능화된 시설을 원상으로 복구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불능화 중단 선언 때에도 나온 논리였고, 이날 판문점 회의에 수석대표로 나온 현학봉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 모두발언에서 했던 말과도 일치했다.
9월 내 결단 나올까?
지난달 26일 불능화 중단 선언이 나오자 북한이 부시 행정부와 더 이상 합의를 진척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다시 회담 테이블에 앉았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벼랑끝전술을 더 펼 것이라고 내다봤다. 19일 나온 원상복구 확인 발언은 그같은 전망과 일치한다.
문제는 북한이 그런 와중에도 경제에너지 지원 실무협상을 남측에 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이 판문점 남북접촉을 요구하자 협상을 진척시키려는 의지가 여전히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처럼 의도가 정반대로 읽히는 북한의 움직임은 9월 말까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북한 지도부의 갈등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10월이 되면 부시 행정부에 남은 시간이 더 줄어든다. 북한으로서도 10.4선언 1주년, 핵실험 2주년, 노동당 창건기념일이라는 굵직한 정치 일정이 시작된다. 이런 일정표를 볼 때 북한이 모종의 결단을 내릴 시한은 9월 말이라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병도 병이지만 9월 안에 '전략적 결단'을 내리기 위해 장고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북한이 판문점 회의를 제의한 것은 향후 '1년 버티기'를 하더라도 현재의 교착 원인이 미국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장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현학봉 대표가 모두발언에서 1990년대 초반 북핵 위기,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사찰 문제 등을 세세히 거론하며 미국이 요구하는 '불시 및 임의 사찰'의 부당성을 설득조로 말한 것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엇갈리는 분석 중 어느 것이 더 옳았는지는 9월 말이 되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대선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강경파들을 무마하고 북한과 타협하는 것은 쉽지 않아 결국은 장기 교착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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