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한'이란 구호에 숨겨진 여러 얼굴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들어선 한국선수단은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이 일순간 메인 스타디움을 감싸고 있었다. 대한민국 선수단의 입장 속에서 중국인들은 환영 대신 침묵을 지켰다. 당황한 것은 아마도 우리 측 인사뿐만은 아니었을 게다. 중국 측 인사들도 순간 우리 못지않게 긴장했으리라. 베이징 올림픽은 이처럼 우리나라에 초반부터 '초'를 치면서 개막되었다. 그 뒤 중국 관중들은 '초'를 친 그 분위기를 경기 내내 살리면서 대한민국의 반대편을 열렬히 응원하였다.
이 대중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88 서울올림픽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88 서울올림픽이 개막되기 전후로 우리나라에선 묘한 반미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당시 한 미국언론이 한국을 비난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올림픽 경기장에선 미국선수들이 '왕따'가 되다시피 하였다. 심지어 미국과 소련의 농구경기에서 한국인들은 일방적으로 소련선수를 응원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 언론은 왜곡된 미국언론에 대항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 주문에 충실히 호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난 후 이러한 '반미' 감정은 금세 수그러들었고, 우리 언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바꾸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의 우방이었던 미국은 소련을 응원한 우리를 이해할 수 없었을 테고, 그 기억은 그들에게 꽤 오랜 잔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도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황당한 '반한' 분위기를 경험하였다. 가뜩이나 중국의 저열한 응원문화에 속상해 있던 우리로서는, 그들의 '반한' 정서에 더욱 흥분하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한'의 악령이 올림픽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뛰놀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베이징 올림픽은 폐막되었지만 '반한'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을 기세다. 왜 그럴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반한'이라는 한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의 얼굴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전에 여러 구실로 숨을 죽이고 있던 '반한' 감정은 마치 중국 연극 속의 변검술사처럼 여러 얼굴을 한 채 동시에 폭발했다.
중국 내 '반한' 감정의 지층학
'반한' 감정을 지층에 빗대어 보면, 마치 여러 겹으로 층을 이루면서 쌓인 얼굴 지층과 같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 중국인들은 올림픽을 잘 치를 수 있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노심초사했다.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SBS의 개막식 사전 정보유출 사건이 터졌고, 이를 전후로 정체불명의 '쑨원(孫文) 한국인설'이 흘러나왔다. 이 기사들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던 13억 중국인의 감정을 순식간에 움직였다. 거대한 군중심리는 중국언론과 함께 대한민국에 '반한'이란 '초'를 선물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반한'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앞서 말한 88 올림픽 때의 반미 감정이 그 예이다. 이는 지층학적으로 보면 가장 표면에 해당하는 정서들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지니는 불편한 감정은 올림픽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 바로 밑의 지층은 중국인들의 '애국주의'를 거스르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대한 분노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분노를 주도하는 계층은 바로 80년대 이후에 출생한 '빠링허우(八十後)' 세대이다. 이들은 소위 '애국주의'의 관점에서 티벳 문제에 대해 서구 언론의 시각에 동조하는 한국 언론들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인터넷이란 자유공간 속에서 중국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글쓰기는 제약을 받지 않았다. 빠링허우의 '애국주의'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백두산 세리모니'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자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중국의 관제 언론과는 달리 이들이 활보하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반한' 감정이 점차 큰 파동을 그리며 거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인터넷 공간에서 맹목적 애국주의가 활보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동북공정'이란 화두가 언론을 휩쓸고 다녔다. 중국 내에서는 '동북공정'에 대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개방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우리나라 언론들은 이 문제를 마치 13억 중국인들과 한국인의 직접적 충돌인 것처럼 과장되게 보도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 내에 '반중' 정서는 곧바로 인터넷 공간 속에서 여과 없는 목소리로 변모하였다. 한국 언론의 자극적인 '반중' 분위기의 편승 속에서 '친중'의 목소리는 매우 생뚱맞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필자가 볼 때, 중국인들이 지닌 '반한'의 가장 깊은 골은 '쓰촨 대지진'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일부 몰지각한 한국의 네티즌들은 '쓰촨 대지진'의 대참사를 대하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천재지변의 참혹한 현장 속에서 중국인들이 느낀 섭섭함과 분노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우리조차 '쓰촨 대지진'을 놓고 욕한 네티즌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익명성을 등에 업고 함부로 까발린 주둥아리가 국가적인 충돌과 재앙을 부를 수 있다고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응의 방법과 범위를 명확히 설정해야
올림픽과 함께 사라지는 군중심리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신속한 사과와 사실 확인만이 필요할 뿐이다. SBS의 실수는 국가적 이미지에 큰 손실을 끼쳤다. 이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사과하면 될 일이다. 쑨원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히 알려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다음 지층으로 내려가면, 사태는 좀 복잡해진다. 티벳의 인권 문제는 대한민국 언론이 저마다 지니는 철학과 주장이 있다. 이를 중국정부와 빠링허우 세대의 코드에 맞출 수는 없는 일이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이 존중될 수 있는 풍토의 조성이 필요하다. 이는 정부 차원이나 언론 차원에서 노력하면, 서로의 입장 차이를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 소위 양 국가의 '애국주의자'들이 충돌하는 현장에선 화해가 불가능할 수 있다. 특히 익명성을 무기로 한 댓글이 남발하는 인터넷 문화 속에서 냉정하고 이성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다. 자극적인 글쓰기로 상대방을 자극한다면, '반한'과 '반중'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국수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충돌은 붓의 전쟁을 부를 수밖에 없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어도나 백두산과 같은 영토 문제 또한 네티즌의 직접적인 충돌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동북공정'이나 영토문제는 학계와 정부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문성과 냉정함을 동반하지 않는 감정적인 대응은 국익 차원에서나 문제해결 면에서나 기대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
'쓰촨 대지진'에 대한 일부 네티즌의 몰지각한 발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옳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지진 참사를 애도하고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일부 유령 같은 네티즌을 철부지 장난이라고 단순히 치부해 버리기에는 중국인들이 받는 상처는 상상 외로 깊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어떤 사안에 정확히 대응하며, 어떤 사안에 한 발 물러나야 하는가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아직 열린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도 아니고, 열린 애국주의를 실험한 세대로 넘어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막 치렀을 뿐이다. '반한'의 지층학을 명확하게 공부해야만 이에 상응하는 정확한 전략이 나올 수 있다. 명확한 분석과 정확한 대응 속에서 한중 우호의 길은 새롭게 열릴 수 있다.
필자이메일:kjsf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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