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여론이 중국으로 집중되었던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시점,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한 압박성 주문이 나왔던 시점,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시작되고 있는 시점, 한국에서는 쇠고기 정국이 끝나고 일본과의 독도분쟁이 잠복된 시점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핵 불능화 작업 중단 발표는 세계의 관심을 다시 북핵 문제로 집중시키기에 매우 전략적으로 선택된 시기이다. 베이징 올림픽과 쇠고기 파동의 정국이 지속된 상황이라면 과연 북한이 핵 불능화 작업 중단을 발표했을까.
이처럼 북한의 대미 핵전략은 미국을 중심에 두면서도 다채롭고 전방위적이며 입체적인 전략으로 마치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북한의 이번 선언은 올림픽 이후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중국이 남한 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남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되어 가는 한미 동맹의 결속으로부터 미국을 다시 북쪽으로 떼어내겠다는 북측의 다각적인 핵외교 전략이 깔려 있는 것이다. 대외적 명분은 핵문제를 통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명단에서 북한이 삭제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의 표출이지만, 남한에 기울어진 미국과 중국을 다시 북측으로 끌어 들이겠다는 외교 전략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북미간의 핵중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핵 불능화 작업 중단을 발표하면 가장 우선적으로 북한에 뛰어들어올 나라라는 점을 북한은 잘 알고 있다.
미국 역시 북핵문제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북한이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을 천명하면 북미간의 직접 접촉이 얼마나 강화될 수 있을 것인지 북측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북한의 핵 불능화 작업 중단 발표는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외형적으로나마 강화되어 가고 있는 듯한 한미동맹의 결속을 견제하고, 미국으로 편속되어 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중국의 대남한 밀착 외교에 고립감을 느낀 북한이 후진타오의 방한에 새로운 견제구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북측의 거시적인 핵외교전략을 차치하고, 미시적인 입장에서 분석해 봐도 북한의 핵 불능화 작업 중단 발표 시점은 매우 절묘하다.
북한의 핵불능화 작업 중단 발표는 북핵 6자회담 5주년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그리고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한 지 꼭 2개월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매우 공교롭게 이뤄졌다.
북한은 영변 핵 시설 불능화 작업을 14일부터 중단했다며 "핵 시설들을 곧 원상대로 복구하는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 미국은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의정서가 합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속된 기일 안에 우리(북한)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았다"면서 "미국이 6자회담 10·3합의를 어겨 우리도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던 북핵 문제가 다시 원점회귀를 시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응에 따라서는 동북아는 물론 한반도에 또 다른 격랑의 파고를 몰고 올수 있음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북한은 왜 영변 핵시설 원상 복구를 시도하려는 것일까.
결론은 북한이 예상한 시점에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한 불만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핵문제로 인한 북미관계가 급진전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중국과 남한간의 군사기술 교류문제가 언급되고 있는 점을 크게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핵중재국인 중국을 향한 북한의 불만도 깔려 있다.
북한에게는 핵해체를 하라고 하면서 남한과는 군사기술 교류를 강화하고 있는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행보, 그래서 북한의 실질적인 핵보유정책이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공습을 막기 위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으로의 편입을 막기 위한 방어책인 것이다. 북한이 쉽게 핵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와 고민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북한의 대미 핵정책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미국을 전면적인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는 실제로 중국으로부터의 위협과 강력한 경제력에 기반한 남한으로부터 위협을 차단하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왜 핵무기를 제조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김 위원장은 남한과의 경제력이 갈수록 격차가 커져 군사력에 있어서도 남한이 월등히 강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남한과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자신의 회고록 <마담 쎄크러테리(Madam Secretary)>에서 밝히고 있다. 북한은 지금 핵해체라는 무장해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과거 북측과 혈맹관계에 있었던 중국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다시 적성국가로 변해가고 있다고 판단되는 남한이 마주앉아 정상회담을 통해 군사기술교류문제까지를 협의하고 있는 현실에 북한의 내심은 매우 불편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북미간의 관계는 좁혀지지 않고 있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별로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북한은 현실타파책으로 핵불능화 작업 중단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미시적인 차원에서 북한의 대미 핵정책이 왜 다시 강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핵심 요인을 분석해 보면 검증문제에 걸려 있다.
북한은 "미국이 약속된 기일 안에 우리(북측)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10.3) 합의 위반이므로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입장을 밝혔다. 부시 행정부때 진척 되었던 북핵 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할 수 있으며 원천 무효화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북핵문제가 장기화될 수 있으며 미국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새로운 협상을 모색할 수 있다는 수순이다. 북한의 대미 핵정책이 변형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 6자회담 10.3 합의를 위반했으므로 우리도 10.3 합의를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는 북한식 함무라비 법전의 대응인 것이다.
미국이 약속을 지키면 우리도 지키고,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도 지키지 않겠다는 이에는 이, 코에는 코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핵문제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한 근원적인 문제점은 다름 아닌 검증문제인 것이다.
북미 간에 검증문제에 대한 확실한 합의점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상태에서 검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까지 검증을 해야 할 것인가, 어느 시점에 검증을 마쳐야 할 것인가, 검증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등 소위 검증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과 방식, 절차 및 검증 시점, 검증 대상, 검증 주체에 대한 북미간의 합의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북미간의 이견이 각각의 생각에 따라 막연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검증에 관한한 북미각자가 아전인수식의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핵 협상이 미봉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행되어 왔던 그 결과를 지금 다시 맞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북미핵협상을 교착 국면에 빠뜨리게 한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북한은 지난 6월 26일 핵프로그램 신고서를 미국에 제출했고, 미국이 북핵 신고서 자료를 북측으로부터 제출받아 판문점을 빠져 나갈 때만 해도 북한은 북미관계가 매우 급진전되고 있다는 심리적 확신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이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 방침을 의회에 통보한 지 45일이 되는 8월 11일이 되면 북한은 자신들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될 것이란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부터 적성국가와 테러지원국가라는 불온한 딱지를 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북측 사정에 밝은 한 인사에 따르면, 이러한 북측의 자신감 있는 의중의 일단은 "미국 대표단이 (북측에) 들어와 핵프로그램 신고서 자료를 가져갔는데 남측에 들렀나요, 그렇지 않으면 (미국으로) 바로 가버렸나요"라는 식의 발언으로 남측을 향해 표출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말의 복선은 북미관계가 밀착된 상태에서 북핵 문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남한은 미국이 정보를 주어야 핵협상을 통한 북미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알 수 있지만, 미국과 북한이 입을 닫아 버리면 고립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미국과 직접 상대하지만 남한은 미국도 북한도 직접 상대 할 수 없는 외교적 하위 국가임을 과시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북측이 감지하기 시작했다. 검증 문제를 간과한 북측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몇 가지를 놓치는 실패한 협상을 했다. 아니 자신들은 정확히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지켰었는데 미국이 애매모호하게 넘어가 북한이 지금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은 핵프로그램 신고서 자료 제출과 검증 문제는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는데 분리적용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어야 했다. 그래서 검증 문제와는 별개로 핵프로그램 신고서 자료 제출에 국한하여 자신들의 테러지원국 삭제라는 합의를 도출해 냈어야 했다. 북한은 지금 자신들이 미국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놓친 부분은 생각지 못한 채, 자신들은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미국으로부터 돌아올 대가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우선 북한이 핵협상에서 놓치게 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국이 북핵신고서 제출서를 받아 나가면서부터 수차례에 걸쳐 핵신고 검증 작업이 쉽게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예시하고 또 예시했었는데, 이 점을 북한이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신고서 제출 당일부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까지 나서서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검증 방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검증작업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미국은 사실 이 부분에서 CVID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내심 작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이 이런 미국의 "모호 전략"을 정확히 읽지도 못한 상태에서 핵프로그램 신고서 자료를 미측 손에 건네주었다면 김계관 부외상이 크리스토퍼 힐의 외교술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은 검증의 문제를 매우 소홀하게 생각하고 협상했었고, 미국에게 최소한 언제까지 핵신고서 자료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시한 규정도 얻어 내지 못했다. 북한은 행동 대 행동이란 큰 틀의 원칙만을 믿고서 핵신고서 자료를 제출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이제야 북한이 미국의 생각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북핵 검증에 관한한 미국은 국제기준을 요구하고 있고 북한은 6자회담 틀 내에서 합의하지 않은 사항임을 들어 미국의 검증 요구가 10.3 합의에 어긋난 것임을 주장한다. 북한은 핵프로그램 신고서만 제출하면 테러지원국 해제 명단에서 삭제될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은 신고와 검증을 동일한 사안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는 결국 검증문제를 놓고 북미간의 새로운 주도권 다툼으로 확산되겠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새로운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본격적인 핵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도 공화당 매케인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는 자신의 외교적 성과보다는 공화당의 차기 집권이 더 우선적인 문제라는 인식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 강공정책은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에 유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매케인을 위해서 북핵 문제를 남겨 놓겠다는 생각이 부시에게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면 한반도는 다시 긴장과 위기의 국면을 맞게 된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오바마와 매케인 중 누가 당선되든 상관없이 부시행정부의 임기 내에 일단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어야만 미국의 새로운 정부를 맞아 대미핵외교를 펼치는데 한 시름을 놓게 된다.
이명박 정부의 입장에서는 혹시 북한을 무시한 채 한미동맹만을 강조하고 중국과의 군사교류 문제까지 한중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혹시 지금의 북한으로 하여금 핵 불능화 작업 중단을 선언케 하는 안보환경을 제공해 준 것은 아닌지 전략적 계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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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문제로 다시 북미, 조중관계가 가까워지면 이명박 정부는 무슨 이슈를 가지고 한미, 한중관계를 더욱 강화시켜 나갈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북한과 소통 없이 미국과 중국을 믿고 6자회담에 참가할 것인지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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