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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극복인가, 대결 지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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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극복인가, 대결 지속인가?

한반도브리핑 <94> 건국 60년, 성찰 좀 합시다

다시 광복절을 맞는다. 이번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아 건국 60년이 집중 부각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무시하고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반발하기도 한다.

논란은 있지만 이번 8.15가 대한민국이라는 새 정부를 수립한 지 60년이 되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지난 60년의 역사를 돌이켜 평가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함은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다. 정부 수립 후 환갑이 되는 것이니 온 나라가 이를 경축하느라 법석을 떨 만도 하다.

60년 성공신화

지난 60년을 평가하자면, 대한민국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좌우 대결로 분단의 상처를 안고 출발해야 했고, 미소 냉전의 한복판에서 가장 친미적인 나라로 규정된 채 새 나라를 시작해야 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지난 60년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빈손의 출발이었지만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아시아의 용으로 불리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물론 노동자·농민의 상대적 희생이 논란되기도 했고, 지방과 농촌의 상대적 불균형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2차대전 이후 이처럼 빠른 속도로 경제력 세계 11위라는 압축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분명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정말 이악스럽게 산업화와 근대화의 성과를 차곡차곡 쌓아 왔던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결과로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그를 토대로 한 민주화 요구가 증대됨에 따라 비록 산업화와 동시에 병행되지는 못했지만 민주화 역시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군부독재의 권위주의 체제가 주도한 산업화의 정치적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반독재 민주화의 요구였고, 결국은 1987년 6월 항쟁의 성공 이후 정치적 공간이 열리면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빠른 속도로 민주주의를 향상시켜 나갔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고 아직도 정치개혁의 과제가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지난 60년간의 굴곡 많은 역사를 감안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결코 스스로 폄하할 수준이 아니다. 결국 한계를 안고 출발한 건국이었지만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측면에서 남이 평가해줄 정도의 비교적 성공적인 발전을 이룬 게 사실인 것이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 ⓒ건국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미완의 성공, 분단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중 거의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압축적으로 성공시켰다는 대한민국의 자부심 한편에는 여전히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다. 바로 분단의 지속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바로 뒤이어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과 역사적 쌍생아라는 점에서 올해 건국 60년을 경축하는 것은 사실 분단 60년의 회한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지난 60년 남북관계는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조금씩 진화해왔다. 분단 이후 남북은 상대방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정당성을 찾는 극단적 대결로부터 시작했다. 1948년의 정치적 분단은 단순히 한 민족이 두 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급기야 1950년의 동족상잔으로까지 증폭되면서 남과 북은 서로를 미워하고 적대하는 무차별적 대결관계를 형성하고 말았다. '국토'의 분단을 넘어 '민족'의 분단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53년 휴전 이후 남북의 분단은 공고화단계에 들어섰고 남북은 본격적인 체제경쟁에 돌입했다.

전쟁 이후 분단의 공고화와 본격적인 체제경쟁의 가속화는 남한의 자본주의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는 한편 북한 역시 사회주의 체제가 보다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남과 북은 서로가 상이한 체제로 더욱 멀어져 갔고, 남한의 반공 국시에 입각한 권위주의 체제와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일체제는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면서 이를 통해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이른바 '적대적 의존관계'로 고착되어 갔다.

또한 분단의 공고화가 진전되면서 불완전한 반쪽은 자기의 반쪽이 아닌 다른 한쪽에 의존하는 종속적 국제관계를 추구하면서 외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야만 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첨예한 대결장이 되어버린 한반도는 남과 북 공히 민족의 협력과 단합이 아니라 각 진영의 첨병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남측은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진영의 이해관계를 추종해야 했고 북측 역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남과 북 모두 적대적인 다른 반쪽을 압도하기 위해 전혀 다른 한쪽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버린 탓에 동북아에서 한반도는 대결적 동맹관계에 좌우되는 피동적인 지위였을 뿐 한 번도 주도적 입장에 서지 못했다.

남북관계의 역사적 과정

1990년대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 이후 남북의 체제경쟁이 무의미해지고 사실상 남측의 승리가 확정되면서 남북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탈냉전이라는 변화된 정세 속에서 남한은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통한 남한 주도의 평화적 통일과정을 시도했다.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적대와 대결보다 화해와 협력이 더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햇볕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일부의 북한붕괴 대망론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결론났고, 대북 강경기조가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 따라 이제 한국 정부는 체제경쟁의 승리라는 자신감을 토대로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본격화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000년 6월에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써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남북 당국의 적대적 대결관계가 화해적 협력관계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혁명대상인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과 남한의 주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인민군 육해공군 의장대를 공동으로 사열한 것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상대방을 흡수통일과 적화통일의 대상으로 간주하던 과거의 관계를 감안하면 남북정상회담의 성사와 여기에서 합의된 6.15공동선언은 남북 당국의 상호 인정과 평화공존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계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평화·번영정책이라는 진전된 구상으로 대북 포용을 발전시키려 했지만 임기 동안 계속된 북핵 문제로 인해 실질적 진전이 제약되는 구조적 한계를 실감해야만 했다.

그러나 북핵문제를 안고 출범했음에도 북핵과 남북관계의 병행론을 유지하면서 북핵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을 관리해내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특히 일관되게 대북 포용의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결국은 2007년 북핵문제 진전에 따른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남북관계는 진일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8월 6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 장면 ⓒ문화체육관광부

대북 강경발언의 마당이 돼버린 한미정상회담

그러나 꾸준히 진화해온 화해·협력의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색국면을 지속하고 있다. 10년만의 보수 정부 등장은 대북 포용정책의 수정을 예고했고 그동안 줄곧 비판해온 '퍼주기'를 피하기 위해 북한과의 대결도 불사하고 있다. 보수진영에겐 여전히 북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고 공존과 화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계와 교정의 대상으로 비쳐지고 있다.

지난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는 잘못된 10년의 대북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단호함마저 보이면서 북한과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끌려 다니기보다는 오히려 대화 중단과 관계 경색을 '의연히' 감수하겠다는 의지마저 보이고 있다.

지난 주 서울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은 미국 대통령의 북한 때리기 화풀이 장소가 되고 말았다. 한국은 미국 내 보수여론을 달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싫은 소리를 하는 좋은 장소로 자리매김되고 말았다. 북핵 상황이 진행형임에도 북한 인권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데 한국 대통령이 동조하고 들러리가 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북미관계가 극한으로 갈 때 그를 도라산역에 데리고 가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이끌어 낸 김대중 정부의 한미정상회담과는 사뭇 다르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체제전환에 욕심을 내며 대북 강경기조를 고수할 때 미국 LA에서 북핵의 평화적 해결원칙을 상기시키고 부시에게 김정일 위원장을 미스터로 부르도록 이끌어낸 노무현 정부의 한미정상회담과도 분명 다르다.

미국의 대북강경책을 순화시키고 우리의 대북정책으로 설득해내던 정상회담이 이젠 미국의 대북 강경발언의 손쉬운 발설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금강산 피격 사건 이후 공동 조사라는, 도저히 북이 받기 힘든 요구를 고집하는 바람에 남북간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은 이미 물 건너 간 일이 되었다. 국제공조로 북을 압박하겠다는 시도는 오히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 삭제 파동을 겪으면서 외교적 망신을 사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에게 금강산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 민망함을 보이더니 북경에서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한마디 대화도 없이 소 닭 보듯 하고 말았다.

북핵문제가 악화일로를 겪던 시기에도 민간 차원의 교류와 접촉은 지속되었고 오히려 그 끈이 남북관계를 잇는 주요한 신뢰선이었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는 대북 압박의 수단으로 민간 단체의 평양방문마저 거부하고 있다. 2000년 이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국제대회에서 공동 입장했던 남과 북이 베이징 올림픽에선 순차입장까지 거부하는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화해협력의 단계에 이르렀지만 지금 시기 남북관계는 때 아닌 경색 장기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돌이켜 봐야

건국 60년이 정상적인 의미의 건국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분단 상황의 해소가 필수적이다. 분단된 건국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우리의 건국은 미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단의 극복은 과거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를 거쳐, 결국은 통합의 남북관계로 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수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속해온 화해·협력의 남북관계가 계속되어야 하고 북핵 문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 필자 김근식 교수 ⓒ프레시안

탈냉전의 국제정세와 한국의 대북우위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포용정책이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 변화를 위한 보다 현실적 대안임은 이미 확인되었다. 예전의 강경정책과 강압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과 북한의 고슴도치식 대응만을 유발했음을 인식한다면 지금 대북정책의 시대정신은 대북 '포용정책'일 수밖에 없다. 노태우 정부 이후 지금까지 대북포용의 과정이 나름의 긍정적 성과를 가지고 꾸준히 '진화'해왔음을 인정하고 이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발전시켜야 함에도 동의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거부감을 갖고 있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역시 역사적으로는 7.4공동성명 이후 남북간 합의들을 체현하고 있고 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한 88년 7.7선언과 기본합의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은 미래에 머물고 있는 북한이라는 '기회의 창'을 지금의 현실적 이익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오기 위해서는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의 남북관계를 유지·발전시켜야 한다. 정치적 입지에 포박되어 전임 정부의 대북 포용을 포기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될 길을 험하게 돌아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동안 적대와 대결, 경쟁과 갈등을 거쳐 상호 인정과 화해·협력으로 발전해온 남북관계를 지금이라도 서둘러 복원하고 더욱 진전시켜 미래의 진정한 평화통일로 가는 시금석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건국 60년에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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