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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와 근대화, 그 사이에서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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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와 근대화, 그 사이에서의 고뇌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8>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인도를 거대한 시장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그 작업은 인도 사회의 근대화를 통해 하였다. 그들은 인도에서 확실한 패권을 확보한 19세기 초 이후 그 동안의 불간섭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도의 종교와 사회에서 행해지던 여러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벤팅크(William Bentinck, 재임 1828-1835) 총독이었다. 그는 힌두의 악습을 방관하는 것은 영국의 인도주의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1829년 인도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악습이라고 하는 사띠(sati 남편이 죽으면 처도 함께 생화장 하는 제도)를 제도적으로 금지하였다. 벤팅크는 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서구 교육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후 과부의 재가를 인정한 1856년의 힌두과부재가법, 10세 이하의 여성과 실제적 부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강간 행위로 정한 1860년의 인도형법 제정 등의 근대화 작업이 법률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 영국 근대화 세력은 사진 오른쪽에서 보이듯 사띠를 반인륜적인 것으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사진 왼쪽에 나타나는 인도 전통주의자들은 사띠를 보존 찬양해야 할 전통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록 자본주의 시장의 확장과 식민 통치의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도입한 것이었지만 영국의 근대화는 인도 사회 내에서 긍정적인 호응을 받았다. 몇 몇 선각자들은 이러한 영국의 정책에 힘입어 인도 전통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그 중심에 힌두교와 힌두 사회의 개혁이 있었다. 그러한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를 들 수 있다.

로이는 동인도회사의 착취에 대해서는 분명한 비판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인도 종교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자세 또한 잃지 않았다. 로이는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주창하였고 그 도구로서 서구 문화를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브라흐모 사마즈(Brahmo Samaj)라는 결사체를 조직하여, 카스트 제도의 엄격성, 우상 숭배, 의례 중심의 종교 행위 등을 반대하고 사띠(sati), 유아 결혼 등의 악습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인권 신장, 남녀평등 등을 옹호하고 홍보하고 다녔다.
▲ 영국은 효율적인 인도 통치를 위해 근대적 대학 설립에 적극적이었고 로이 같은 선각자 또한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사진은 1800년에 꼴까따에 설립된 포트 윌리암 대학(Fort William College)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벤팅크 총독이 이끄는 인도 사회의 근대화와 궤를 같이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식민주의자와 보조를 같이 한다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사회 개혁에 관한 태도가 너무 급진적이라며 대다수 보수적인 인도인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고, 그들은 인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 가치가 사라질 것에 대해 두려워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이 사회를 수 천 년 동안 기득권 세력으로 지배해 온 브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은 보수적 방향의 종교 개혁 운동과 민족주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스와미 다야난다 사라스와띠(Swami Dayananda Saraswati)의 아리야 사마즈(Arya Samaj) 운동이다. 아리야 사마즈는 근대화 대신 '베다의 순수성 회복'을 목표로 하여 힌두교의 개혁과 동시에 민족 정신의 고취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당시 힌두교와 인도 사회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개혁하는 방법에는 근대화론자들과 다른 즉 복고적이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근대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남녀평등, 인권과 같은 개념이 이미 베다 시대에 있었고 당시 문제가 되던 카스트의 심한 차별과 배타, 의례주의, 우상 숭배, 사띠와 같은 여러 가지 악습 등은 베다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베다가 충분히 사회 개혁의 모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베다를 힌두 이상 사회의 뿌리로 보고 이를 당시 힌두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린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비판하는 힌두 사회의 여러 악습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베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중세 이후 만들어졌거나 악화되고 변질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베다 시대는 아직 정착도 이루어지지 않은 유목 시대였기 때문에 정착 사회의 유산인 그런 다양한 악습이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유목 이동 사회를 이미 근대가 시작된 이후에 사회 변화의 모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러한 여러 악습이 중세에 심화되고 확산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슬림의 도래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그런데도 그러한 생각이 널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아리야 사마즈가 활동을 하던 이 당시에는 '중세 = 무슬림 시대'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슬람은 악의 존재이자 힌두 문화의 파괴자라는 식의 생각이 널리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리야 사마즈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힌두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중세 즉 '이슬람의 핍박에 대항하며 사회를 보존하고자 할 수 없이 만든' 힌두교의 여러 악습을 버리고 진정한 힌두의 모태인 베다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이다.

아리야 사마즈가 카스트와 남녀에 기반을 둔 힌두 사회의 전통이 맹목적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은 것은 당시 영국 식민 지배에 의해 카스트에 기반을 하는 힌두 전통 사회가 크게 흔들려 붕괴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스트의 변화는 동인도회사에 의해 농촌이 황폐화되면서 농민들이 토지에서 유리되면서 시작되었다. 전통적 토지 체계가 붕괴되자 전통 사회 구조 밖으로 내몰린 하층 카스트는 어쩔 수 없이 농촌에 기반을 둔 세습 직업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근대화와 함께 새로 도입된 도로 공사, 가죽 가공, 술 제조, 축산, 소금 생산, 토지 개간 등의 일을 하면서 상당한 경제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화와 함께 도입된 토지 사적 소유제로 인하여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도 이제 돈만 있으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확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많은 세력들을 규합해 유사한 성격과 지위를 갖는 다른 카스트들과 연합을 이루고 나아가 결사체나 정당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영국 정부가 추진한 사회 개혁과 더불어 도입된 유럽 근대 사상과 정치 발전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영국 정부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장된 통신과 도로의 발달 또한 특정 지역을 넘는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비슷한 카스트끼리 연합하는 카스트 운동을 추진할 수 있게 하였다.

카스트의 이동 운동은 낮은 카스트들이 일차적으로 브라만들의 생활 양식을 모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더 높은 상층 카스트로 이동하는 것을 통해서 하였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위치를 확인받고자 자신들의 문화를 브라만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보다 오염되지 않고 보다 정(淨)한 쪽의 문화나 관행, 예를 들면 채식주의, 금주, 과부 재혼 금지 등을 시행하였다. 또 정기적으로 의례욕(儀禮浴)을 시행하고 브라만을 초대해 여러 가지 의례를 열기도 하며 브라만을 매수해 높은 카스트들이 사용하는 산스끄리뜨 이름을 사용하거나 조상에 관한 족보를 고치고 신화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확보해 놓은 돈이나 정치력 등의 세속 권력을 기반으로 이러한 일이 잘 진행되도록 브라만을 비롯한 주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80년 대 이후 선거제가 도입되자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낮은 카스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 운동에 앞장서면서 보다 넓은 지역의 카스트 연합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제 카스트 연합은 단순한 카스트 서열 이동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정치 운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위계적 카스트가 근대화로 인해 정치적 단위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낮은 카스트들이 브라만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고쳐가자 기존의 브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높은 카스트들은 역으로 근대화 쪽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고쳐나갔다. 그것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모방하니 브라만 특히 도시에 사는 높은 계층 사람들이 그들과 적극적으로 차별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족 내 과부에게 재가를 허용한다거나, 결혼 지참금 같은 것을 받지 않는다거나, 자녀를 외국에 유학시켜 서양의 문화를 답습하는 것으로 생활 양식을 바꾸어 나가거나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 보니 근대화는 당시 사회의 권력층인 기존의 브라만, 도시인 그리고 새로 성장한 엘리트층에게 중요한 삶의 양식이자 사회에서 권력층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지배 문화가 되었다.

권력자인 영국이 앞장서고 기득권자인 브라만과 도시 엘리트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근대화는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어 일부 낮은 카스트에서는 카스트 이동을 위한 책략으로서 브라만 문화의 모방 대신 철저한 비(非)브라만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운동은 다른 많은 낮은 카스트들이 브라만 문화 속에서 자신의 서열 상승만을 추구한 것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카스트 제도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중 사회 건설을 역설하였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나중의 공산주의 운동과 연결되기도 했고, 일부에서는 브라만적 의례와 브라만의 사회 권위에 대해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인도의 각 지역 특히 남부 인도 각 지역에서의 자영농 혹은 소규모의 부농 중간 계층이 상당한 경제력을 확장하던 때였다. 그들은 새로운 작물 재배의 도입, 유통 구조의 개선, 유럽 등 세계 시장으로의 판로 확대, 토지의 저당권 확대 등과 같은 새로운 경제 체제 속에서 성장한 농촌 부르주아로서 기존의 브라만을 중심으로 한 지주 계급과 시장 및 새로운 직업을 놓고 심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적극적으로 근대화에 앞장서도록 하였고 특히 서구 교육에 몰입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자손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직업을 가진 중간 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비브라만 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되었으며 결국 브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지주 세력과의 경쟁에서 보다 많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 가운데 상강수는 처음부터 카스트 이동 대신 브라만 문화에 대한 저항의 기치를 든 강한 정치적 운동을 천명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873년 죠띠라오 풀레(Jyotirao Phule)에 의해 세워지고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마하라슈뜨라 주에서 큰 영향을 끼친 진리정화회(眞理淨化會)가 대표적인 예이다. 풀레는 브라만의 억압에 신음하는 다수 인민들의 수호자로서 협회를 창립하였으며, 협회의 우선적인 목표는 브라만 계급과 힌두 경전으로부터 낮은 카스트를 구제하는 것이었다.

협회에서는 매주 말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 반브라만, 반카스트, 반의례의 계몽 교육을 실시하고, 나아가 집안의 과부들을 재가시키고, 브라만 사제를 참석시키지 않는 결혼식을 거행하고, 학교를 세워 하층 카스트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등 다양한 사회 개혁 실천 운동을 이어 나갔다. 교육과 운동을 위해 중간 계층의 부호와 상인들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부터 후원을 받았으며, 거기에는 영국 식민 정부로부터 받은 것 또한 적지 않았다.

비브라만 운동은 처음에는 1885년 만들어진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를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에 참여를 했다. 그러나 인도국민회의가 브라만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운영되고 정책의 방향이 자신들 공동체의 이익과 충돌하면서 그들 즉 민족주의 진영과 결별하였다.

그들은 영제국주의의 착취보다 상층 카스트 지주의 착취에 대해 훨씬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급기야 1917년에는 따밀나두 주의 비브라만들이 남부인도자유연맹이라는 대중 정당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반(反)인도국민회의 및 친(親)영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들의 카스트 연합 운동은 영제국 정부에 의해 분할 통치의 수단으로 교묘히 이용되었고, 자연히 후대의 민족 운동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도 민족 (혹은 국가)이 우선하기 때문에 민족보다 특정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 도모하면 비난을 면하기 어렵지만 인도에서는 상황이 다르고 또 다른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 좋은 예로 진리정화회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한국의 1920년대 백정 계급 해방 운동에 앞장 선 형평사 운동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형평사 운동은 민족을 배신하면서 일제에 아부하여 부와 권력을 얻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민족 의식보다 계급 의식이 강하였고 그것이 근대 사회에 더 합당한 가치라 여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정부와 인도에 대한 영국 제국주의 정부의 성격과 위치 그리고 상호 간의 관계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단순화 시켜 말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하는 운동을 크게 폄하하는 것이 항상 옳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실용주의를 앞세운다는 -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실용주의'보다는 '효율주의'가 더 적절하다 - 현 정부가 추진하는 민영화 정책이 갖는 의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영화를 하면 효율성이 높아지고 그리 되면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고 경제가 더 많이 성장하면, 가진 자, 힘 있는 자만 더욱 더 많이 갖고, 더 힘이 세지는 역사를 분명히 목격해 왔다. IMF 외환위기 그 와중에도 대기업의 순 이익은 천문학적으로 늘고 대기업 중심의 구도는 더욱 강화되었고, 사회 기득권층의 사회적 위치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면서 구조 조정과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현상에 내몰리면서 많은 중산층 및 서민만이 개인 파산과 가정 파탄 그리고 죽음에 내몰렸다.

그야말로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그들에게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할 수 있을까? 근대 인도의 불가촉천민이 같은 민족이지만 수 천 년 동안 자신들을 짓밟아 온 브라만보다 근대화를 가져 와 그 카스트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영국 제국주의와 손을 잡은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한국 사회에서도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바벨탑 쌓기에 더 이상 협조하지 않은 촛불, KTX 여승무원,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화물연대 노동자, 2008년 7월 29일 현재 327일 째 천막 농성을 계속 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 노조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 KTX 여승무원 파업이 800일을 넘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주류 집단이 갖는 천박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더디 가도 함께 가는 것이 옳다. 그 앞에 민족이든, 국민이든, 국가든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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