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행복하려면 匠人(장인)이 되어라 (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행복하려면 匠人(장인)이 되어라 (하)

김태규 명리학 <351>

오늘날은 돈, 권력, 그리고 명성을 얻기 위한 무한투쟁의 판세라서 자신의 직업과 일에 만족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다.
  
  일과 직업이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런 경우보다는 돈과 권력, 명예라는 세 가지가 불만의 원인인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직장 상사나 동료와의 불화 등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은 그런 배경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얘기이다.
  
  비유를 하나 들고자 한다.
  
  밭을 가는 농부는 시선이 발치에 놓인 밭에 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밭을 갈 수 있고 곡물을 잘 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것이 궁금해서 다른 이가 밭을 더 잘 가는지 더 좋은 무엇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관심이 가면 눈은 발치에 있지 않고 자꾸만 고개를 들어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 그 밭이 잘 갈아질 것이며 작물을 잘 심을 수 있겠는가?
  
  건성으로 심은 작물이 잘 자라지 않듯이 하는 일도 그렇다. 그러면 일과 직업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성과도 그렇다. 그러다보면 이거 적성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자꾸 들게 된다. 마음이 들떠있는 것이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여기거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불만, 수입이 적다고 여기거나 바람보다 적으니 불만, 권력 또는 권한이 적다고 여기거나 소신껏 일을 할 수 없다고 여기니 불만이다.
  
  하지만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일과 직업에 충실하지 않는 것이 그런 불만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해법은?
  
  당연히 하는 일, 눈앞의 일에 충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정성을 다 할 때, 일에 혼을 불어넣을 때 그 사람은 장인이 된다.
  
  나머지 문제들, 돈과 권력, 명예의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먼저 돈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富(부)라는 것은 결국 한 사회 내에서 상대적 성질의 것이다. 일인당 소득이 10 만 달러가 되어도 빈부의 상대적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좋은 사회란 부의 상대적 차이가 다른 사회에 비해 좀 더 적은 사회인 것이지, 차이가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기에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일단 수입에 맞추어 사는 것이 우선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차근차근 노력을 하고 개선해가야 하는 일이다.
  
  권한이나 권력이 적어서 또는 소신껏 일을 할 수 없어서 불만인 경우도 그렇다.
  
  반대로 생각해보라,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구성원들이 모두 소신껏 일을 하겠다고 자기주장만을 펼친다면 산으로 오르는 배의 형국이 될 것이다.
  
  극적으로 표현하면 전쟁에서 모든 병사들이 상하 없이 작전결정권을 지닌다면 그 군대의 말로가 어떻겠는가.
  
  그렇기에 조직에서는 더 나은 판단과 선견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일반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정이나 존경 받지 못할 때 오는 불만에 관한 문제는 약간 성질이 다르다.
  
  이는 사회 전체적인 수준이나 풍조가 서로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풍토가 생겨나면 가능한 일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줄어들면 되는 것이다.
  
  물론 제도적인 해결은 어렵다. '직업귀천금지법'을 만든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고,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을 표현하며 사는 사람, 즉 예술을 하며 사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 풍토로서 자리 잡으면 되는 일이다.
  
  부와 권력이란 나눌수록 적어진다. 하지만 묘하게도 '존중'이란 부와 권력과 는 달리 나눌수록 커지는 묘한 성질을 지녔다. 상대를 존중해줄 때, 상대도 나를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禮樂(예악)의 정신이 요구된다.
  
  禮樂(예악)은 절도와 화합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절도란 상하와 귀천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중함을 표현하고 담을 수 있는 틀로서의 절도 즉 禮(예)인 것이다.
  
  그리고 화합이란 간단히 말해서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고우니 그를 통해 화합을 이룩하자는 의미에서의 것이다.
  
  이처럼 예악의 정신을 오늘에 맞게 되살려내면 바로 그것이 文化(문화)가 번성한 나라가 되는 길이다. 뮤지컬이나 갤러리가 많은 나라가 문화의 나라가 아니라, 예악이 잘 살아있는 나라가 바로 문화강국인 것이다.
  
  곤궁한 시인에게 참 좋은 시를 쓴다고 해줄 때 좋은 시와 시인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고, 구두 닦는 아저씨에게는 닦은 구두가 정말 아름답다고 해줄 때 구두닦이는 예술가로 자긍심을 가질 것이다.
  
  아내에게 가끔씩은 '당신, 그간 너무 고마웠소'라고, 남편에게는 '당신, 너무 애 쓰시네요' 하는 한 마디 말이 오갈 때 그것이 禮(예)고 樂(악)인 것이다.
  
  장인의 일이나 농부의 일은 얼핏 보기에 단순반복, 지루하다. 발전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 속에 실은 창조의 기틀을 담고 있다.
  
  같은 일을 무한 반복하다보면 어느 경계에선가 그 일은 단순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다 보면 어느덧 그림 속에 자신만의 개성과 표현이 스며들고, 밥도 끊임없이 짓다보면 같은 밥이 없음을 알게 된다.
  
  같은 경우가 없음을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기술을 넘고 예술의 경지로 들어선 것이다.
  
  다시 거기서 재미가 들려 열심히 하다보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경지로 들어선다. 드디어 道(도)의 경지로 들어선 것이다.
  
  저번 글에서 庖丁解牛(포정해우)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 일화는 우리가 단순한 일로 시작하여 예술로 승화시키고 나아가서 도의 경지로 들어서는 절차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소를 잡는 포정의 일은 예술이었고 도의 경지였지만, 그 일을 그렇게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문혜군'의 식견과 아량을 우리 사회가 지닐 때, 예악이 살아있는 세상이고 문화를 통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 여긴다.
  
  저번 글에 이어 莊子(장자)에 실린 또 다른 일화를 들려드리며 글을 맺고자 한다.
  
  환공(제 나라 임금)은 당상에서 글을 읽고 있었고 윤편(수레 만드는 장인)은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런데 윤편이 연장을 내려놓고 올라오더니 '공께서 읽는 책은 어떤 말들입니까?' 하고 물었다. 공은 聖人(성인)의 말씀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죽은 성인의 글이니 그것은 성인의 찌꺼기일 뿐이네요' 하고 윤편이 말했다.
  
  노여워진 환공은 '감히 자네 따위가 성인의 글에 대해 평을 하다니 무슨 연고인지 말하라, 답이 온당치 못하면 곧 죽음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에 윤편은 답을 한다.
  
  '소인이 하는 바퀴 깎는 일은 너무 느슨하게 잡으면 견고하지 못하고 너무 되게 잡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가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에 그 오묘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요.
  
  치수야 물론 잘 알고 있지만 이 일의 요령만큼은 제 아들에게도 알려줄 수가 없고 제 아들 역시 저에게서 받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흔이 된 지금까지 수레바퀴를 깎으며 살고 있지요.
  
  그러니 옛 성인도 그 오묘함은 전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고 있는 글 역시 옛 사람의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요.'
  
  환공은 그 말이 실로 옳다 여기고 방면해주었다.

  
  장자에 실린 이 일화는 도가 무엇인지 왜 세월 속에서 무한반복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도란 것은 왜 자본처럼 누적되고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특별한 경험으로 끝나거나 남에게 전수될 수 없는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장인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자신의 일과 직업이 단순반복이고, 무미건조하다 느끼면 아직은 그저 노동이다. 그것이 그러나 능숙해지면 기술에 이르고 또 다시 예술이 되며 마침내 도의 경지로 들어서면 일과 내가 둘이 아님을 체득하게 되니 그로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하기에 따라 노동자와 장인, 예술가, 道人(도인)으로 나뉘는 것이다.
  
  모두 道人(도인)이 되어 행복해지시기를.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