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람들을 초청하여 환대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를 통해 경제발전 전략을 성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국가적 관심,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이라면 '평양 초청 정치'라고 명명할만하다. 이러한 평양 초청 정치의 첫 사례는 김정일이 2009년 12월에 '성진제강련합기업소' 노동자, 기술자, 일군을 평양으로 초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김정일은 2011년 10월에 함경남도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를 평양으로 초청하였고 곧이어 2011년 11월에 자강도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를 평양으로 초청하였다.
김정일에 의해 3번, 김정은에 의해 1번 시행된 평양초청 정치의 내용과 순서 등을 잘 분석하면 김일성에서 김정일을 거쳐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경제발전 전략이 상징적으로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시기별로 기술적으로나 규모 및 상징적으로 선도적인 공업부문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 북한 김정은 제1비서가 지난해 12월 22일 광명상 3호 발사에 기여한 과학자와 간부 등 관계자들을 평양으로 초청, 연회를 열어 격려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주체철 생산 방법 완성
2009년 12월 평양으로 초청받은 함경북도 김책시의 성진제강련합기업소 노동자, 기술자들은 원대한 대접을 받았다. 코크스를 사용하지 않고 철재를 생산하는 방법인 '주체철' 생산 방법을 완성한 것이 계기였다. 1990년대 경제난으로 인해 멈추어 섰던 용광로를 다시 가동시키면서 자신들의 오랜 꿈인 주체철 생산방법을 완성한 것이다.
1950년대 중공업 중심의 전략을 처음으로 추진하던 당시, 김일성은 끊임없이 과학기술자와 해당 기업에게 코크스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개발하라고 요구하였다. 중공업 중시 정책을 채택하였으므로 철재 생산이 원활하게 되어야 경제활동이 계획대로 제대로 수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철재 생산의 핵심 연료인 코크스가 북한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므로 연료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대한 김일성의 문제 제기였다.
해방 직후 북한 지도부는 북한 지역에 있는 제철·제강소를 정상 가동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1956년 12월부터 시작된 북한 대중운동의 대명사 '천리마운동'도 소련으로부터 강재 수입이 급감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또한 천리마운동의 시작점인 '강선제강소'는 강재 생산의 마지막 단계인 '압연기'가 북한에서 유일하게 가동되고 있던 곳이었다. 당시로써 첨단 생산 설비라 할 수 있는 산소취입법을 활용한 전기로 등이 설치된 곳도 제철·제강소였다. 이렇게 중요한 생산설비 가동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코크스에 의지해서 가동한다는 것은 북한 지도부에게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에 주종명이 중심이 되어 코크스 사용량을 대폭 줄인 공법이 1958년에 개발되었고 그는 1959년에 제정된 '인민상' 1회 수상자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도 북한 지도부는 코크스 사용량을 줄이는 것을 넘어 완전히 사용하지 않는 공법을 만들라고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주문하였다. 즉 북한에 매장량이 풍부한 무연탄만을 사용한 철재 생산 공법을 개발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렇게 생산된 철을 '주체철'이라고 명명하였고 이에 대한 완성은 김일성 생전에는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990년대 경제난으로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조업이 재개된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 2009년에 코크스를 전혀 쓰지 않는, 즉 무연탄만으로 철재를 생산하는 공법을 완성하였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 실상은 좀 더 자료가 모여야 판단 가능할 것이다. 외부에서는 효율이 떨어진다, 이후 가동이 중단되었다 등의 이야기는 있지만 북한 내부 언론에서는 주체철 생산에 성공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실상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자료가 모인 뒤에 내릴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주체철 생산에 성공한 관련 노동자, 기술자들을 평양에 초청하여 환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요 생산설비인 산소용융로와 정련로에게 '김일성 훈장'이 수여되었다. 전대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유업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석탄화학공업 체계 정상화
2011년 10월 함경남도의 노동자, 과학자, 기술자들은 무연탄 가스화에 의한 비료생산방법을 넘어 갈탄 가스화에 의한 비료생산 체계를 완성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양으로 초청받았다. 북한에서 생산되지 않는 석유 대신, 풍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탄(무연탄, 갈탄)을 활용하여 각종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체계를 되살린 것이다.
중공업 분야 중에서 경공업, 즉 주민들의 실생활과 연결되고 농업과도 직결되는 분야가 바로 화학공업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옷감을 비롯해 페인트, 접착제, 합성수지 그리고 비료 등을 생산하여 생필품 생산과 식량 생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김일성이 1950년대부터 끊임없이 강화, 육성하였던 내용이다.
북한이 최초로 전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업시설을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1961년 5월에 완공된 '2.8 비날론련합기업소'이다. 조선사람(리승기)에 의해 개발된 이론을 바탕으로 북한 스스로가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공장이었다. 게다가 비날론은 나일론보다 색이 흐리고 강도가 약하긴 했지만 '면'과 성질이 비슷하여 대중적(인민적) 섬유라고 불리던 것이라 대중노선을 추구하던 북한 정책과 잘 부합되는 것이었다.
철재 생산 시설이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어 있던 것을 이어받아 정상 가동시킨 수준이었다면 비날론공장은 북한이 스스로 만든 대규모 공업시설이었으므로 이는 북한 공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중심으로 석탄을 활용하는 화학공업체계를 다시 정상화시킨 것은 북한 스스로 공업화 단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자존심의 회복이었다. 게다가 이것의 마지막 부산물 중에 '비료'가 정상 생산될 수 있게 되어 식량난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경제회복의 청신호가 울리는 것이라고 북한 지도부가 의미 부여할 만하다.
이러한 흐름만 보면 김정일에 의한 최근 북한의 경제 전략은 김일성이 수립한 정책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실현하는 수준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뒤이어 자강도의 노동자, 과학자, 기술자를 초청하는 것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CNC를 활용한 생산기술의 발전
2011년 11월 자강도 사람들의 평양초청은 최근 북한의 핵심 경제발전 전략인 CNC화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자강도에 있는 련하기계공장이 중심이 되어 CNC 기술 개발과 이를 통한 생산 현장의 CNC화, 즉 현대화, 과학화, 정보화의 흐름을 일단락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평양으로 초청한 것이다.
자체 개발한 CNC기술로 CNC공작기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순부터였다. 이것이 구체적인 성과로 드러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고 제대로 된 CNC공작기계는 1990년대 중반에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김정일은 이렇게 확보한 CNC기술을 바탕으로 낙후한 생산설비들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는 구상을 수립하였고 1990년대 후반부터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CNC기술 개발, CNC공작기계 제품 생산, 중심 거점의 생산 시설 CNC화/CNC기계로 대체, 기존의 생산설비에 CNC기술을 접목하여 개량하는 등의 일들이 전개되었다.
▲ 2010년 8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집체공연 '아리랑'에서 '컴퓨터제어기술(CNC)'을 선전하는 매스게임이 등장했다. ⓒ연합뉴스 |
그러다가 CNC공작기계의 대량 생산과 CNC공작기계의 전파를 위해 희천기계공장을 CNC공작기계 생산 기지로 전변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번 자강도 방문을 통해 드러난 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은 CNC공작기계의 대량 생산체계가 구축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축구장 몇 개를 붙여놓은 넓이의 공장에서 CNC공작기계가 대략으로 줄지어 생산되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곳에는 항온, 항습 조절 시스템까지 갖추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CNC공작기계를 생산할 수 있는 11축 CNC공작기계가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기계공업기술의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CNC공작기계 제작 기술을 높은 수준에서 확보하였고 이것을 경제 전반에 전파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는 의미에서 김정일은 이들의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짧게는 30여 년, 길게는 60여 년에 걸친 노력에 의해 최첨단 수준의 기계공업기술을 확보하였고 김정일은 이를 바탕으로 북한 경제 전반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구상으로 이들을 평양으로 초청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연속성, 차별성
후계자는 선대 최고지도자의 사상을 이어받을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후계자에 대한 분석은 '연속성'과 함께 '차별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서로 모순될 수 있는 두 요소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살펴야 한다.
3번에 걸친 김정일의 평양초청 정치 흐름을 보면 연속성과 차별성이 명확히 보인다. 북한 경제의 토대는 김일성이 만든 것이다. 주체철 생산 체계와 석탄화학공업은 북한 경제의 가장 핵심요소라 할 수 있다. 2009년 12월, 2011년 11월 평양초청 행사는 이러한 흐름을 되살렸다는 의미였다. 반면 2011년 11월 평양초청 행사는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경제발전 전략으로 대비되는 김정일의 전략이 부각된 행사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강화하기 시작한 과학기술중시정책은 김정일이 시작한 것이고 이것의 핵심이 CNC이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김정은의 앞으로 행적은 과학기술을 통한 돌파전략을 적극 이어받는 흐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광명성 3-2호 발사 성공 관련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한 이번 행사는 김정은이 김정일에 의해 발전, 확보된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민생을 안정, 향상시키는 경제발전 전략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
이번 평양 초청 행사 끝에 광명성 3-2호 발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김정일훈장' 수여한 것을 성진제강련합기업소의 사례와 비교하여 보아야 한다. 당시에는 김일성훈장이 수여되었고 이번에는 김정일훈장이 수여되었다. CNC에서 인공위성까지는 김일성, 김정은이 아니라 김정일에 의한 성과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김정은은 이를 충실히 잘 집행할 수 있음을 이번에 보였다는 것이다.
2013년 신년사에서 제시된 구호인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경제 강국 건설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자!"에서 우주를 정복한 정신과 기백 속에는 우주를 정복한 과학기술력이 들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 강호제 박사가 운영하는 북한 과학기술사 관련 홈페이지 바로가기
* 북한과학기술네트워크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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