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생명현상의 이해
지난 시간에는 복잡계를 소개하였지요. 이번에는 궁극적인 복잡계라 할 수 있는 생체계(biological system)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고, 물리학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의 해석을 소개만 하겠습니다. 몇 해 전에 '생체계의 물리'라는 강의를 개설했는데 물리학 전공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기 동안 강의했거든요. 여기서는 한번 강의로 마쳐야 하니 아주 간단하게 지나갈 수밖에 없지요. 서론만 얘기하겠고, 부담 없이 흥미롭게 들으면 되겠습니다. 먼저 물리학과 생물학의 관련에 대해 간단히 얘기하고, 생명이 무엇인지 살펴본 후에 분자 수준에서 세포까지, 그리고 개체에서 전체 생태계까지 나아가는 여러 단계에서 얻어지는 문제들을 소개해보지요.
물리학과 생물학
일반적으로 물리학과 생물학은 서로 다르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리학과 생물학은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 화학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물리학과 생물학이 직접 관련을 맺고 서로 역할을 한 사례가 제법 있습니다. 예를 들면 17세기, 뉴턴과 같은 시대에 훅(Robert Hooke)이 현미경을 만들어서 코르크를 관찰하고 세포를 발견했습니다. 사실 세포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개구리 알도 하나의 세포인데 옛날부터 누구나 보았겠지요.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세포를 현미경을 통해서 처음으로 관찰한 사람이 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물리학자라 할 수 있고 현미경이란 물리학의 이론을 이용한 광학기구(optical instrument)이지요.
18세기에 갈바니(Luigi Galvani)는 개구리 다리를 전기로 자극하면 움직이는 것을 관찰했고, 따라서 동물의 움직임이 전기신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갈바니는 의사이자 물리학자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체전기 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에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로서 헬름홀츠(Hermann L.F. von Helmholtz)는 전자기이론과 열역학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시각에서도 중요한 기여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는 마이어(Siegmund Mayer)는 염통과 호흡에 관련된 생리학 연구를 수행했지요.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다 알다시피 왓슨(James D. Watson)과 크릭(Francis H.C. Crick)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알아내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연구는 물리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핵심 역할을 한 크릭은 물리학자였지요.
21세기에는 물리학과 생물학이 훨씬 가까워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종래에는 생물학은 현상론으로서 생명현상이 어떻다는 기술만 했고, 물리학에서는 생명과 관계없이 간단한 현상만을 다뤘지요. 이제는 이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생체계는 워낙 알기 어려운 복잡계로서 물리학으로 다룰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곧 이론과학의 관점, 다시 말해서 보편지식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는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생명현상도 보편지식 체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복잡계를 다루기 위한 이론 및 실험 도구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지요.
한편 생물학도 20세기에는 분자의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탐구하는 분자생물학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현상의 실체로서 물질을 상정하므로 물리과학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른바 환원주의 관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물론 분자 수준에서는 생명이란 현상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체분자는 단지 커다란 거대분자일 뿐, 보통 질소나 산소 분자 따위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지요. 또한 생물 실험에서도 이제는 정량적인 측정이 가능해졌습니다. 생명현상을 연구할 때도 물리적인 실험 방법을 써서 정량적인 자료 값을 얻으며, 이에 따라 모형을 구축해서 이론적인 이해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우주에 대해 논의할 때 은하의 별을 통해서 사람이 탄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람을 이루는 원소는 기본적으로 별의 격렬한 삶의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고 했지요.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현상을 보이는 생체계도 결국은 은하나 마찬가지로 물리법칙에 의해 지배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현상에 대해서도 보편적 체계는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만 복잡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는 생체계는 일반적으로 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복잡계로서 생명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며, 생명이란 생체계 구성원 사이의 협동에 의해 떠오르는 집단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물리(biophysics)라는 용어를 들어봤지요? 생물학을 물리학이란 도구를 통해서 이해하려는 비교적 전통적인 분야를 말합니다. 반면에 최근 생체계를 물리학의 한 주제로 연구하려는 분야를 생체계물리(biological physics)라고 부릅니다. 그 두 가지의 차이는 다음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물리학이 생물학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생물학이 물리학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오(Ask not what physics can do for biology; ask what biology can do for physics.)"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같지요? 미국 대통령이던 케네디(John F. Kennedy)의 말을 따서 울람(Stanislaw M. Ulam)이라는 수학자가 프라우엔펠더(Henry Frauenfelder)라는 물리학자에게 한 말인데, 앞의 경우는 생물물리, 뒤의 경우는 생체계물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뒤의 경우를 생물물리라고 부르고 앞의 경우는 물리생물(physical biology)이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연과학은 물리과학과 생물과학 - 또는 생명과학 - 으로 나눠지고, 대표적인 물리과학으로서 물리학의 핵심적인 의미는 보편지식 체계, 곧 이론을 탐구한다는 점이라고 앞에서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은 전형적인 이론과학이죠. 이와 관련해서 원자의 행성계 모형을 제안한 러더포드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연과학은 물리학이거나 아니면 우표수집이다(Science is either physics or stamp collecting.)" 이론과학 외에 다른 과학은 자료를 모으는 활동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보편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이론과학이 아니면 단순히 현상을 기술하는 현상론(phenomenology)이라는 뜻입니다. 생체계물리 말고도 화학물리(chemical physics), 지구물리(geophysics), 의학물리(medical physics) 따위에서 보듯이 무슨 물리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이론과학의 관점에서 보편지식 체계로 엮어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기본입자를 구성하는 쿼크부터 전체 우주까지 모든 것이 대상이지요. 그중에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일반적으로 분자 수준부터 고려합니다. 쿼크 따위는 생명을 비롯한 우리 일상의 세계와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지요. 생명에 중요한 분자로는 흰자질과 DNA 따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자들이 모여서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같은 세포 소기관(organelle)을 이루고 이들이 모여서 세포를 이룹니다. 세포가 모여서 조직(tissue)을, 조직이 모여서 염통이나 두뇌 같은 기관을 이루며 기관이 모여서 기관계를 이루죠. 순환계라던가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또는 소화계 따위, 그런 것들이 모여서 개체를 이루고 개체가 모여서 집단(population)을, 이와 환경이 합하여 군집(community), 그리고 이들이 모두 합해져서 생태계(ecosystem)가 됩니다. 그것이 모두 모이면 지구라는 생물권(biosphere)이 되지요. 그래서 생명의 범위는 작게는 분자로부터 크게는 지구까지로서 매우 넓지만 그래도 물리학에서 다루는 전체 대상의 범위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입니다.
* 이 연재기사는 지난 2008년 12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책갈피 출판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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