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16일 여성계 인사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금강산 피격 사건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은 이 대통령의 북한관, 남북관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개성공단·관광과 금강산 관광을 단순히 어려운 북한을 도와주는 '동정과 시혜'의 차원으로만 사고하는 '경제 대통령'의 편협한 대북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지적이다.
이날 발언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6년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한 이후 반복돼 온 북한 관련 언급을 보면 이 대통령의 대북관·정세관에는 한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게 아님을 볼 수 있다.
■ '시혜적' 대북관
이 대통령이 가진 시혜적 대북관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곳은 새 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인 '비핵·개방·3000 구상'이다.
"북한이 개방하고 한국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제사회와 협력한다면 10년 안에 북한의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수준까지 올라설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을 택하는 대결단을 내린다면 국제사회도 상응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올바른 선택만 한다면 짧은 기간에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될 것이며 이는 평화통일로 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2007년 2월 6일, 외신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비핵·개방·3000 구상'을 관통하고 있는 대전제는, 일종의 경제적 '떡고물'을 제시하면 북한이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할 것이라는, 놀랄 만큼 순진한 낙관주의다. 이와 동시에 한국이 북한을 도와주면, 북한 역시 '고마움'을 느끼고 스스로 '변화'할 것이라는 인식도 깔려 있다.
금강산 관광 문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북한을 돕는 일"이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은 그가 금강산 관광을 단순히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외화벌이 통로를 막으면 슬금슬금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다.
여기에는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등으로 대표되는 남북교류로 인한 군사적 긴장완화, 그로 인해 한국에 돌아오는 유·무형의 이득에 대한 이 대통령의 무지 혹은 무시가 녹아 있다. 정치권과 학계에선 이같은 대통령의 '시혜적 대북관'이 남북관계 급랭이라는 문제를 초래한 커다란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비핵·개방·3000'은 북쪽한테 굉장히 자극적인 것으로 모욕을 준 것"이라며 "강하게 밀어 붙인 것보다 모욕을 준 게 더 기분 나쁜 것"이라고 지적했다.
■ MB 혼자 쌍팔년도?…낡아빠진 동북아 정세관
"중국과 오랫동안 북한 때문에 관계 개선을 하지 못 하다가 새 정부가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것을 합의했다. 이것이 남북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북한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2008년 5월 29일, 중국 순방 수행 경제인 조찬 간담회)
이같은 발언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요즘 읽고 있는 신문이 대체 몇 년도에 발행된 것인지를 묻게 한다. 한국과 중국이 오랫동안 관계 개선을 못 했다? 그 이유가 북한 때문이다? 한중관계가 개선되면 남북에 영향을 미친다? 동북아 정세를 보는 관점이 시쳇말로 '쌍팔년도' 냉전시대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할슈타인 원칙'(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원칙) 같은 게 있는 듯하다.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정식 수교했다. 그에 따라 북중관계는 잠시 소원해졌던 게 사실이고, 그러면서 관계를 재조정했다. 겉으로는 '전통적 혈맹'이었지만, 실제로는 이해가 같은 부분에서만 협력하는 전략적인 관계로 변모했다. 그게 벌서 16년 전의 일이다. 그 후로 북중관계는 한중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와 별 상관없이 돌아갔다.
한편 중국은 지난 16년 간 한국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은 2004년부터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섰기 때문에 유달리 가까워 진 게 결코 아니다. 이 대통령은 5월 중국 방문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었지만 내용상 과거와 달라진 게 없었고, 오히려 한미동맹에 관해 뼈있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중관계가 가까워지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언급 역시 요즘에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얘기다.
■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보자…맥락 없는 돌출 발언
"과거 남북 간에 합의된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6.15공동선언, 10.4정상선언을 어떻게 이행해 나갈 것인지에 관하여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 우리는 호혜의 정신에 기초하여, '선언의 시대'를 넘어 '실천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2008년 7월 11일, 18대 국회 개원식 시정연설)
이명박 대통령이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던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두 선언을 그 전 3개의 선언이나 합의서와 동렬로 놓은 것이 문제였다. 두 선언을 존중한다는 말만 하면 남북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북측의 요구를 뿌리쳤다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이 5개의 남북 합의가 어떤 역사성과 맥락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이 대통령이 꼬박꼬박 챙기는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선언은 중요한 문서다. 그러나 거기에는 탄생 당시의 정세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 문서들을 언급하는 것이 현재의 남측에 유리하지 않을 대목도 있다. 청와대는 이 사실을 검토하긴 했는가? 일례로 7.4공동성명에 있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 중 민족대단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충돌한다는 걸 따져 보긴 했나?
대통령뿐만 아니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연설에서 제안한 '남북정치회담'도 맥락이 없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제공동위원회, 남북국방장관회담 등 약속해 둔 회담이 여럿 있고 절차가 있는데, 그런 합의는 무시한 채 정치회담을 열자는 것은 뜬금없기 그지없다.
정치회담의 의미는 무엇이마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회담 대신 왜 꼭 그걸 해야 하는지를 검토했는지 궁금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국에서 느닷없이 내놓은 남북연락사무소 제안과 같이 '그냥 내뱉은' 막가파식 제안이 아닐 수 없다.
■ 모든 문제가 햇볕정책 탓?…'묻지마 책임전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를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 탓으로 돌리는 '책임전가' 역시 대북정책 난맥상의 근원 중 하나다.
"현 정부의 포용정책이 통일을 더 멀게 한다. 현재의 대북정책은 전면 수정돼야 한다. 현 정부의 대북 지원이나 협력이 북한 정권에 힘을 실어주고, 북한 주민에게는 혜택을 주지 못했다.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에 힘을 주고 북한 주민의 생활을 어렵게 해 통일을 더 멀게 하는 것 같다." (2006년 10월 26일, 독일 메지에르 전 총리와 회동)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보여 준 대북정책은 실망의 수준을 넘어 심히 우려스럽다. 유화적으로만 흐른 햇볕정책으로 인해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의 증폭되고, 한미동맹이 이완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국민의 세금이 아무런 성과 없이 낭비됐다는 점이다." (2007년 11월 8일, 재향군인회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
'햇볕정책'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은 취임 후에는 '무시'로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최근까지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 최대 성과로 평가받는 6.15공동선언, 10.4선언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북한에 대한 '전면적 대화'를 제의한 최근 국회 개원 연설에서야 이를 공식적으로 언급했을 뿐이었다.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지난 15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과거 정부가) 국민들에게 실효성 없는 핫라인을 만들어 놓고 과대선전을 했고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핫라인으로 상징되는 남북관계가 단절된 것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걸 과거 정부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견강부회, 아전인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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