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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만 여전히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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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만 여전히 버티고 있다

[권혁태의 일본 읽기] <17>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과 죽음

▲ 자살한 산노미야가 활동했던 공항반대 청년 행동대의 사진 ⓒ권혁태

경찰관의 죽음과 농민의 자살

나리타 산리즈카 공항 예정지인 도호(東峰) 십자로. 1971년 9월. 5000명의 기동대와 이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학생과 농민들 간에 극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화염병 등으로 3명의 기동대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20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55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은 13년이나 걸렸다. 3명은 무죄, 52명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2주 후, 현지 농민이면서 공항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산노미야 후미오(三ノ宮文男)가 자살했다.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머니에게. 오랫동안 고생시켜드렸습니다. 제가 체포될 때마다 많이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있었지만, 표현을 하지 못했습니다. 공항 문제가 없었다면 저도 결혼해서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공항을 세우려는 놈들이 밉습니다.

아버지에게. 제가 (공항반대를 위한) 청년 행동대 일로 바빠서 농사일을 못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나면 열심히 농사일을 하려 했습니다. 공항을 우리 집에 세우려 하니 안 싸울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인간답게 살려 하는데 왜 자꾸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는지(…)정말로 국가 권력은 무섭네요. 살려고 하는 농민의 인생을 완전히 빼앗아 부셔버리니까요. 산리즈카 공항 반대! 마지막까지 산리즈카를 지켜주세요."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유서만으로는 알 수 없다. 또 그가 실제로 경찰관 3명의 죽음에 관여했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저 농민으로 살고자 했던 청년의 꿈이 국가 권력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것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는 현지에 태어난 농민의 아들이었고 도시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던 동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과는 달리 산리즈카에 남아 농사꾼으로 살고자 했다는 것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동료들의 추측을 통해 그의 자살 동기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산리즈카 기록 영화를 만든 일본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인 오가와 신스케(小川 紳介, 1935- 1992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동료들에게 파문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가르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직접 책임은 아니라고 해도 경찰관 3명의 죽음은 '농사꾼'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이 같은 '희생'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죽음'으로써 이런 상황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산노미야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생명을 지키려는 운동이 생명을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고뇌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죽음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뜻은 실현되지 않았다.

가스총에 희생된 활동가

산노미야의 자살이 있고나서 6년 후인 1977년 5월 8일, 한 청년이 경찰이 발사한 가스총에 맞아 이틀 후 병원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리타 산리즈카 공항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공항 예정지에 반대파 농민들이 세운 철탑을 경찰이 강제로 철거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한 강력한 데모가 일어났고, 부상자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던 청년이 경찰이 발사한 가스총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함몰되면서 죽은 것이다. 청년은 히가시야마 가오루(東山薫). 당시 30살이었다. 이 사건으로 반대진영에서 296명, 경찰 측에서 125명이 부상했고, 33명이 체포되었다. 유명가수이면서 학생운동 투사와 옥중 결혼한 가토 도키코(加藤登紀子)가 희생자인 히가시야마를 기리는 노래 '가오루의 시(詩)'를 1978년에 발표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히가시야마는 1947년 6월 오사카 가이츠카 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자치회(학생회) 회장을 맡으면서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1968년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핵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투쟁에 고등학생들을 조직하여 참가하였고, 1969년 동경 도립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하다가, 1970년에 돌연 대학을 중퇴한다. 대학 중퇴는 아마 산리즈카 투쟁과 맞물려 있는 듯하다.

그가 산리즈카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대학 입학 직후. 나리타 투쟁을 농민들의 사유재산을 지키는 '부르조아 운동'으로만 폄하하고 있었던 그는 실제로 산리즈카 투쟁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부모님이 모두 교사이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났던 도시 중산층의 그에게 농민들의 삶의 새로운 발견이자 충격이었다. 그는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농민들의 투쟁 목적이 토지라는 사유재산을 지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삶', 혹은 '생명'을 지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다.

위에서 말한 도호 십자로 사건을 경험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주저 없이 대학을 그만둔다. 그리고 산리즈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트럭과 택시 운전사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주로 산리즈카에서 생활하면서 반대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학생운동가에서 산리즈카의 주민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97년에 산리즈카의 당사자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도 하늘처럼 맑은 넓은 마음이 가오루에게 어울리는 듯해서 아주 기쁩니다. 이 땅은 가오루가 사랑했고 사랑 받았던 제2의 고향입니다. 가오루는 이 산리즈카에 청춘을 불사르고 영원히 잠들게 되었습니다. 가오루는 산리즈카의 여러분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권력과 싸워나갈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생명의 고귀함을 느낍니다. 가오루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가스총에 희생된 히가시야마 가오루의 묘비 ⓒ권혁태

가오루가 쓰러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5월 9일 새벽에 공항 예정지 파출소를 약 50명의 데모대가 화염병으로 공격했다. 파출소에 있었던 히가시야마와 동갑인 30살 경찰관 한 명이 사망했고 6명이 화상을 입었다. 히가시야마에 대한 복수였다.

나리타 관제탑 점거 사건과 자살

나리타 공항 개항을 나흘 앞둔 1978년 3월 26일.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신좌익 활동가들이 공항 관제탑을 기습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를 "농민들의 반대 운동과는 전혀 다른 법과 질서의 파괴이며,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폭거"로 규정했다. 또 일본 공산당도 "트로츠키 폭력집단에 대한 철저한 단속"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의 <타스 통신>은 "일본의 모든 진보세력이 공항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영국의 <가디언>도 공항 개항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일본 정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나리타공항은 개항을 두 달이나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에도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만 168명. 관제탑을 점거했던 15명과 이 사건을 기획했던 두 사람은 모두 기소되었고 이 중 주동자 2명에게는 10년 이상의 장기 징역형이 선고 됐다. 공항 측은 1억 엔 이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관계자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해 이를 모두 납부하였다.

야마가타 대학 학생이었던 니이야마(新山幸男)는 기동대가 발사한 가스총으로 화상을 입고 구타를 당한 끝에 두 달 후 사망한다. 또 관제탑을 점거한 활동가 중의 한 사람인 하라 이사무(原勲)는 형무소에서 복역 중,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1982년에 석방되었지만 곧 자살한다.

나리타 공항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물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60 줄에 접어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청춘의 기억'으로 나리타를 기억한다. 또 많은 활동가들이 나리타공항 반대 운동을 자신들의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고 있다고 증언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히가시야마 가오루처럼 1960~70년에 산리즈카에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경험한 활동가들 중에서 지금도 60여명 이상이 산리즈카에 거주하고 있다.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산리즈카에 들어갔다가 농민이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산노미야의 동료 아키바 기요하루(秋葉清春)는 사건으로부터 37년이 지난 2008년 경찰관 3명의 위령비에 헌화하면서 "(경찰관에게도) 약혼자가 있었고 자식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상대 입장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겨우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공항반대운동 사무국 차장이었던 시마(島寛征)는 "기동대라고 생각하고 싸웠는데 죽은 것은 기동대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들이 이렇게 새롭게 깨달았다고 해서 물론 '국가'가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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