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부문에서 유럽보다 더 안정된 번영을 구가한 무갈의 경제는 17세기말부터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 동안 100년 넘게 무갈의 근간을 구축해 온 세금 징수 및 치안 유지 기구가 크게 흔들렸다. 원래 무갈 정부는 모든 관리에게 일정한 급여와 세금 징수권을 주면서 그것으로 일정 수준의 군대의 유지를 하도록 하는 봉건 제도를 운용하였다. 이를 통해 무갈 중앙 정부는 강력한 관료를 육성하고 그들의 후원 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여 영토 확장과 강력한 통치 기반을 다졌다. 세금 징수권은 원래 현직 관리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었으나 점차 세습되면서 중앙 정부의 경제력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전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토지의 산성화가 더해졌다. 중세 이후 농경이 확장되면서 토지는 그 산성화의 정도가 심해졌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경작 기술이나 농업 과학 등의 발전이 뒤따르지 못해 문제 해결을 할 수 없었다. 중세 이후 집단 이주가 일어나면서 경작지는 대규모로 늘어났으나 인력이 부족하여 생산량 증대를 이룰 수가 없었다. 당시 인구의 증가는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나 대부분의 증가 인구가 농경이 금지된 최하층 불가촉천민 층에서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농업 생산 인구 부족의 문제는 해소되지 못했고 인구 대비 생산만 갈수록 악화되었다.
무갈 제국의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정책은 국력의 낭비를 가져왔고, 너무 넓은 영토를 확보함에 따라 자연히 중앙 정부 권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아우랑제브가 벌인 수년간에 걸친 마라타(Maratha) 동맹과의 전쟁은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데칸 지방의 융성한 무역과 산업을 황폐화시켰다. 여기에 아우랑제브는 아크바르 이래로 샤 자한까지 꾸준히 유지된 무갈 사회의 기틀인 종교 융화 정책을 폐기하고 지즈야를 부활하면서 힌두들의 많은 불만을 야기하였다. 귀족들의 타락과 당파 싸움도 무갈 쇠퇴의 큰 원인이었다. 세금 징수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정부 관리와 징세 청부인과의 갈등 그리고 조정의 파벌 싸움 또한 황제 권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결국 18세기 무갈 말기에는 제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였고, 많은 수의 독립 혹은 준독립 상태의 토후 세력들이 전국에 걸쳐 등장하였다. 남부 인도의 하이드라바드, 남서부에서 출발하여 델리까지 판도를 키운 마라타, 동부의 벵갈, 서부의 라즈뿌뜨, 뻔잡 등이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법, 행정, 사회, 조세 등의 정책을 새롭게 수립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총체적인 사회 변화와 경제 위기의 극복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무갈 쇠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 변화 의식이 없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봉건 귀족 세력에 맞서는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국민 국가와 같은 새로운 정치·사회의 정체성에 입각한 체제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카스트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 사회 구조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연결되어 중상주의의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그를 둘러싼 유럽 열강의 정세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식민 경험을 겪게 되는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가 갖는 공통점이니 조선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조선은 인도보다 150년이나 늦게 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하지만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전통 봉건 체제에 머물러 있어 구체제를 탈피하여 근대화를 이끌어내는 세력을 성장시키지 못했고, 그 위에서 과학적 사고는 크게 결여 되어 있어 생산력 증대를 이루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방위력조차도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었다. 조선은 마치 150년 전 인도가 영국에 대해서 그랬듯이 근대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간의 무역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식민 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한편 17세기 유럽은 봉건 사회가 여전히 잔존하였으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근대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고 초기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절대 왕권은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면서 공업의 육성과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에 낡은 봉건적 세력과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력이 충돌하였으나 서유럽을 중심으로 후자의 세력이 점차 막강해져 갔고 결국 17세기 영국에서 두 번의 혁명을 겪은 후 절대주의가 무너지고 입헌정치가 수립되었다. 당시 서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은 국내에서의 물품 수급을 원활하게 하고 대외 수출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지리상의 발견과 보조를 맞추면서 식민지 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국내 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를 값싸고 쉽게 확보할 수 있고, 국내 상품을 쉽고 유리하게 판매할 수가 있어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영국의 인도 정복은 이런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인도네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에서 네덜란드에게 패한 후 인도에 전력을 다하기로 한 상태였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무갈 황제로부터 제국 내의 어디에서나 상관을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는 포괄적인 허가를 획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결국 각 지역의 통치자로부터 개별적인 상관 설치 권리를 얻으려 했고 급기야 동인도회사는 처음으로 아라비아 해 연안에 있는 수라뜨에 상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를 필두로 쩬나이, 뭄바이, 꼴까따에 상관을 설치하고 요새를 구축했다.
18세기가 되면서 영국에서 면직물 산업이 주목받으면서 당시 면직물 가내 수공업이 크게 발달한 벵갈이 큰 주목을 받았다. 동인도회사는 아우랑제브 사후인 1717년에 공무역에 대한 관세 면제특권을 획득하면서 본격적으로 벵갈 공략에 착수한다. 그렇지만 당시의 관세 면제 특권은 사무역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공무역에만 주어진 것이었는데, 당시 벵갈 정부 관리들이 부패하여 모든 사무역에도 공공연히 면세 무역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때 벵갈 지역에 눈독을 들인 영국은 프랑스를 일축한 후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1757년에 벵갈과 쁠랏시(Plassey)에서 싸웠다. 초반에는 패했으나 쩬나이로부터 구원군이 도착한 후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벵갈 태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다. 쁠랏시 전투는 영국 측 7명, 벵골 측 16명의 전사자를 낳은 아주 작은 규모의 군사적 충돌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것이 인도 역사의 흐름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은 중요한 사건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쁠랏시 전투에서 승리한 동인도회사는 벵갈 태수 임면권을 장악한 후 당시 태수를 폐하고 새로운 인물을 꼭두각시로 앉혔다. 그 후 동인도회사는 새로운 태수로부터 많은 이권을 챙기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벵갈로부터 비하르와 오릿사 지방까지 확대된 관세 면제 특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이 특권은 무갈 정부로부터 이미 받은 공무역 면세 특권을 넘어 사무역에까지 범위가 확장된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인도 상인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이 부가되었다. 관세 면제 특권 외에도 동인도회사는 전쟁 발발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받았고, 캘커타에서의 자유로운 요새 구축을 허가받았으며 주화 주조권도 획득하였다.
결국 인도 상인들과 토후는 몰락하고 동인도회사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1765년에 무갈 제국 정부로부터 벵갈, 비하르, 오릿사 지방의 조세 징수권까지 확보하였다. 이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획득하면서 동인도회사는 광대한 벵갈의 부(富)를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의 손에 들어간 벵갈의 부는 인도 침략에 쓰일 군대와 행정의 조직에 적극 활용되었다. 그리고 획득한 부를 무역에 재투자하여 더욱 막대한 부를 획득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의 산업혁명 발생의 재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쁠라시 전투로 인해 영국은 종래의 무역 활동에서 벗어나 인도를 식민 경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쁠랏시 전투의 1757년을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의 시작으로 본다. 사실 인도가 언제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의 경우와는 크게 다른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는 공식적인 계약에 의해서였든지 아니면 강압에 의해서였든지 간에, 1910년 이후 주권을 상실했고 그로 이때부터 전국토가 일제의 강점에 의해 식민 지배 밑으로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그런 기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도에 들어 온 영국 제국주의는 1757년 이후 벵갈, 비하르, 오릿사 등 인도 북부의 일부 지역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동인도회사가 그 지역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긴 했지만 그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무갈 제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엄연히 살아 있었고, 심지어는 벵갈의 토착 지배권도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었다. 동인도회사는 이곳에서의 불평등 무역을 통해 확보한 이익과 엄청난 규모의 조세로 행정 조직을 갖추고 대학을 만들어 하급 관리를 양성하였고 많은 인도인을 용병으로 불러 모아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군사력으로 각지로 진격하여 토후 세력을 하나씩 격퇴하였다. 1800년 초가 되서 북부의 가운데 지역과 남부의 큰 세력들이 복속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곳도 있고, 일부는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와 군사의 보호 아래에 놓이게 된 경우도 있었다. 보호조약을 체결한 곳에서는 그 나라의 군대를 해산해야 했고, 동인도회사가 자기 군사를 주둔시키는데 드는 비용을 부담해야 했고, 이웃에 있는 적대 세력과 전쟁을 하면 서로 도와준다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인도회사는 인도 전역에서 인도 세력끼리 힘을 모아 저항할 수 있는 기회를 미리 차단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볼 때 결국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게 된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18세기까지 인도에 하나의 민족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인도회사가 들어 올 무렵 인도 각지에는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 세력이 꽤 있었으나 그들은 서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영국과 합세하여 상대방과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중국사에서 볼 수 있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중국 전체 단위로서의 저항 같은 것은 일어나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청조가 영국과 싸워 그 패전의 멍에를 쓰고 불평등조약을 맺어 이권을 넘기거나 영토의 일부를 넘기는 일이 일어났지만 인도에서는 무갈조가 영국과 직접 싸워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인도 안에 존재하던 모든 이질적인 세력이 하나의 인도 민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 영국이 그들을 하나의 식민 대상으로 삼으면서 지배를 한 지 약 100년 정도 지난 뒤의 일이었다.
1757년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은 1856년에 가서 대부분의 세력이 영국에게 복속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물론 여전히 영국에게 복속을 당하지 않거나 영국이 일종의 방파제의 역할로 복속시키지 않고 그대로 나둔 상태의 독립국의 상태로 있었던 곳도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은 인도의 각 세력을 최대한 분리시켰고 그로 인해 인도인의 손에 의해 인도의 각 세력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이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갈 제국이 통치권을 박탈당하고 완전히 망한 것은 1859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식민 지배 시작을 1859년부터 잡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면, 인도사에서는 '식민 지배의 시작'과 같은 단일한 역사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다. 인도사는 단일한 특정 사건이 나라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은 드물다. 그만큼 나라가 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구성원의 다양성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한국사에서의 사건은 그 파급의 측면에서 상당히 단일적이다. 비교적 원초적 민족성이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데다 범역 또한 비교적 작고 좁아 어떤 충격이 발생하면 그 파급 효과가 전국적으로 끼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아니면 문화적이든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늘어나고 그로 인해 거기에 붙는 가속력이 순식간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대전 엑스포 때도 그랬고,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랬으며 영화 '괴물' 때도 그랬다. 1987년 6·10 항쟁 때도 그랬고 지금의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 때도 그렇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냄비 근성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들쥐 근성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표피적 표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냄비 근성이든 들쥐 근성이든 아니면 단일적 역사성이든 그로 인해 많은 일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영화 '괴물'이든 2002년 월드컵 응원이든 그 '신드롬'에 끼지 못할 경우 사회에서 따돌림 당할 것 같은 두려움,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 맹목적 획일성과 같은 부정적인 인과 관계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그로 인해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일부지만 독재 청산 같은 일들을 이루어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성 위에 최근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터넷 보급률이 결합되면서 더욱 무서운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다. 이 촛불 집회가 보여주는 것을 통해 볼 때 광우병 쇠고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이미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다. 촛불 집회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많은 국민은 이미 새로운 정치 문화 구조에 들어 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새로운 정치 문화는 대의 정치를 직접 정치로 대체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이나 일본 혹은 유럽의 소위 정치 선진국에서는 체험할 수 없던 것이라 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를 할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독특한 정치 문화를 이미 체험하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의 이 역사적 사건을 20세기의 낡은 정치학 교과서에 따라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 정권이 매우 불안하다는 사실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한 정부가 이끄는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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