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국가를 넘어선 남북통일은 불가능할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국가를 넘어선 남북통일은 불가능할까

[6.25 정전기념일을 맞는 단상] 한반도 평화와 풀뿌리 공동체

한반도는 아직 휴전 상태이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일까.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상식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게만 말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또는 국가와 국가를 '참칭'하는 반란 세력 사이에는 늘상 일어난다. 심지어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평화의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강변한다. 어떤 사람은 냉전 이후에는 냉평(냉전없는 냉전 평화)이 지속되고 있다고도 말한다.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6.25전쟁도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을 쉬고 있는 휴전 상태, 적대상태이지 전쟁이 없는 평화 상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간에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 멀지 않은 1999년 연평해전과 2002년 서해 교전 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2002년 6월 29일 일어난 서해교전은 당시 한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고 있었고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이 치러지는 날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남북 민중, 나아가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 지역은 언제든 끔찍한 전쟁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지역이라는 생각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2000년 6월 15일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의 대통령이 평양에서 북한 최고 지도자와 회담하고 6.15선언을 발표한 이후 남북간 교류 협력이 본격화되면서 한반도에는 비로소 전쟁 상태가 끝나고 평화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된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하는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에 따라, 그리고 남한에서도 대북 강경론을 주장하는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남북관계는 시시때때로 크고 작은 대립과 긴장이 밀물처럼 밀려오곤 한다. 또한 북한이 자위를 천명한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할 때마다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재발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으로 다시금 부상되곤 한다. 아직 한반도에서 평화의 나무는 어리디 어린 묘목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해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이라는 그 기간 동안에만 있었던 전쟁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미 1950년 이전에도 남북간에는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서로 왕래를 중단한 적대상태에서 전쟁과도 같은 충돌과 전투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어리석은 질문같지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년에 왜 그토록 끔찍한 전면전쟁을 벌였을까. 왜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자마자 당시 한반도 인민의 절대다수가 원했던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 시키면서 서로 다른 적대 국가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문은 왜 아직도 한국과 북한은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분단 상태에서 적대하는 두 국가로 남아 있을까. 1992년 구소련이 붕괴되고 이른바 냉전체제가 해체된 지금도 왜 미국은 여전히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북한과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남북 분단과 이의 원인, 그리고 분단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놓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분석과 방안을 내놓았다. 국가권력을 가진 남북의 역대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의 역대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국의 민간에서도 분단 극복의 통일논의는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악의 축인 공산주의 원인론, 공산주의체제 박멸론, 그리고 더도 덜도 없이 그와 똑같은 차원인 제국주의 원인론과 박멸론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극단론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점에서 명쾌한 원인 규명과 대안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는 작업은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북한 분단과 6.25전쟁은 이른바 국제정치의 수많은 요인이 중첩되어 발생되었기 때문이며, 지금도 그런 다양한 요인이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의 실질 책임자이면서 아직도 한국의 정치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시각만 보더라도, 미국 원흉론, 미국 환원론에서부터 미국 활용론, 미국 변수론, 미국 상수론 등등 너무도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존재한다.
  
  여기서 이런 논의를 일일이 점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이제는 이런 논의을 틀을 과감히 깨면서 보다 근원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싶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독재정권의 통일론 독점이 깨지면서 민간에서 백화제방의 남북통
  
  일론이 부상하였다. 특히 민주화운동의 이념 기반이자 의심의 여지 없이 남북통일론의 핵심 기초였던 민족주의에 대해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도발의 구호와 함께 과감한 비판과 성찰이 제기된 것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족통일론의 신화를 허물어뜨리는 쇠망치 구실을 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 통일이 현재진행형임을 주장하며 민족 공조와 교류, 대미 자주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최장집은 남과 북이 불안정한 반쪽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두 개의 근대국가이며 정체체제라고 지적하면서 해방 직후 좌절됐던 민족주의 통일을 다시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남한 사회의 양극화와 사회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공존 체제가 목표라고 주장한다. 구갑우 등 평화운동 일각에서는 평화국가를 대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평화국가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지금까지 분단의 원인과 그 극복 방안, 통일 방안은 사실 거의 대부분 국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평화국가론의 발제를 맡았던 구갑우는 근대국가의 본질이 억압과 착취의 폭력기제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현실주의의 접근으로서 시민 중심의 평화국가론을 역설한다. 모든 국제정치가 국가를 중심으로 실행되고 또 사고되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현실에서 이제는 국가 자체에 대한 근원의 질문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통일론도 결국 착취와 폭력의 전쟁국가를 추구하게 된다는 이중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국가 차원의 통일론 시각을 과감하게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반도 통일을 미국이라는 국가는 과연 원할까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서로 다른 많은 이설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가운데 핵심은 근대 국가 자체이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야말로 전쟁에서 시작해서 전쟁으로 파멸하고야 말 최악의 기획물이다. 국가가 없었다면 그런 끔찍한 6.25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런 지적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몽상이자 근본주의, 이상주의의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 지적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그렇게도 국가를 고집할까. 따지고 들어가면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한 전쟁은 필연이다. 국가는 국가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늘 전쟁을 일으킨다. 이른바 갈등 관리란 이름 아래 아무리 평화 상태가 잠시 유지된다고 해도 특히 자본주의 국가는 생산력의 증대를 위해 강력하고도 거대한 소비시장, 전쟁을 필요로 한다.
  
  미국은 늘 전쟁을 필요로 하는 군산복합체의 전쟁국가이다. 6.25전쟁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미국이 전쟁국가임을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국방비 하나만 예를 들어 보아도 전세계 다른 모든 나라의 국방비 전부를 합친 액수와 비슷하다. 미국은 전쟁이라는 숙주가 있어야 생존하는 괴물같은 기생국가이다.
  
  한반도는 이런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애초에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사실 전쟁이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군함 5척과 1천 2백 명의 해군병력을 동원해서 조선을 침략하였다. 신미양요라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이 도발한 명백한 제국주의 불법 침략이었다. 미국은 1905년에는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도록 일본 제국주의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기도 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고종은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41년 진주만 폭격 이후 전쟁 상태가 되기 이전까지 미국은 늘 일본과 동맹 관계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미국의 주요 동맹 국가는 지금까지 여전히 일본임은 상식이다.
  
  애초에 1945년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상태에서 한반도가 해방된 것은 조선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한반도의 남북을 38도선에서 일직선으로 갈라 각각 점령한 것도 조선인들이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분단된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국가 지도가 직선으로 그어진 것과 똑같았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쟁탈 전쟁과 타협을 통해 그 땅에 살고 있던 아프리카 토착민들의 삶의 경계, 자연 지리에 적응해서 수만 수천년 동안 살아오던 부족간의 구불구불한 경계를 깡그리 무시하고 일거에 직선으로 선을 그어 급조된 근대국가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제국주의 두 강대국의 한반도 분단은 이처럼 동서냉전의 시작과 함께 한반도에 두 개의 근대국가를 만들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지정학은 이른바 미국식 세력균형 이론과 실천이 지배하는 장소였다. 물론 이런 국가간 군사력을 중심으로 하는 힘의 균형 이론과 현실은 여전히 한반도를 관통하는 핵심 의제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른바 국제정치의 세력균형이란 1, 2차 세계대전과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한 군비증강과 전쟁을 뜻한다. 국가간 세력균형, 나아가 '악의축' 박멸이란 지구상 인류의 공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부시와 부시행정부의 저 거대한 힘, 돈과 무기와 공무원들, 부시를 지지하는 수많은 미국 시민들은 그 자신들이 원컨 원하지 않건 간에 눈먼 전쟁중독자들, 눈먼 살인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냉혹하고 차가운 기계와도 같은 이른바 지정학과 세력균형 국제정치의 희생자들일 뿐이다.
  
  분단체제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론의 하위 체계로서 남한을 거의 식민지와도 같이 지배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런 미국이라는 상수에 대해 주목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흔히 선민주주의, 선평화론으로 비판받는 최장집의 주장은 이처럼 여전히 한반도를 압도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심층의 분석이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남한 사회 곳곳에 빨판을 대고 한 순간에 진공청소기처럼 남한의 노동력과 상품을, 남한 민중들의 피와 땀을 흡수해가는 미국의 힘을 우리는 1997년 IMF 사태 때 실감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남한을 엄연한 현실의 근대국가로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어떤 의미있는 정치사회 이론도 있을 수 없다. 남한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남북한 평화의 조건은, 민주주의의 자치와 자립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미군철수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다. 미군철수가 없는 자치 자립이란 솔직히 반쪽의 불안한, 언제든 늑대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울타리 밖의 양 신세보다도 못한 자치 자립이다.
  
  미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남한의 민주주의와 남북한 간의 평화가 지속가능할까. 일부의 논자들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내세우면서 오히려 미군이 남한과 일본에 주둔한 상태에서 남북한 간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할까.
  
  이런 논리야말로 이른바 국제정치 공학의 발상이며 끝없는 순환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미군이 철수하면 중국의 영향력이 극대화됨으로써 남북평화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는 한반도는 늘 주변 강대국의 속국이어야 한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일찍이 미국의 한 학자는 미국 체제를 '프렌들리 파시즘'이라고 부른 바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아니라 늘 파시즘처럼 세력 확장을 꾀해 왔다. 북한과 적대관계를 유지하거나 필요하다면 국지전이건 제한전이건 전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전쟁 직전의 상황을 유지시키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명백한 목표이다. 그래야만 남한에 군사 무기판매가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말하면서 기업파시즘을 실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규정력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한반도를 따로 떼어내 달나라로 가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실천하고 통일에 관한 협상을 한다면 모를까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들어와 있는 미국의 힘을 무시하고 통일 논의건 사회 전환 논의건 그 어떤 한국 사회의 의미있는 변화를 기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의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사태도 먼저 이명박 정부의 무능과 무조건 퍼주기 식의 굴욕 협상이 문제였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 퇴진운동으로 진행된 것이지 문제 자체는 언제든 반미 시위로 변할 수 있는 휘발성 강한 의제이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은 여전히 국가 차원의 체제 전환 이론이다. 이행의 논리가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분단체제론은 다만 국가 차원의 논의만 있을 뿐, 여전히 시민사회의 기획이 없다. 분단체제론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기획과 상상력이 사실상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백낙청의 분단체제 극복 대안이 결국은 부국강병론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통일론은 그 명분이 무엇이든 부국강병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한은 교류 협력도 남한 자본주의의 경제성장과 부국강병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경제 재건과 성장의 관점, 부국강병의 관점에서 교류 협력을 바라본다.
  
  남한의 통일운동 세력에게서도 여전히 강한 국가주의의 부국강병론, 민족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론의 인식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부국강병론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 강국의 위협 요인이며 그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성찰은 없다.
  
  이는 민중생활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하다는 것과 동일하다. 북한을 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부국강병론 아래서 어찌 인민들의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극단으로 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부국강병 논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은 남북한이 서로 증오와 극단의 적대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비견할 만하다. 고르바초프는 구소련이라는 국가를 해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의 해체까지는 이끌어 내지 못했다. 6.15선언은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유격대 국가와 발전국가, 시장국가의 해체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이후의 과제일 것이다.
  
  6.15선언의 선제안자는 남한이었다. 이렇게 남한이 선제안자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은 물론 군사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형성된 국가와는 다른 시민사회의 생성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국가를 기본 시각으로 하는 통일 논의는 물론 중요하다. 현실의 국가를 부정하거나 국가 차원의 통일론을 외면한다는 것은 사실 몽상이다. 그러나 1국가 통일론이건 2국가를 상정하는 연합 내지 연방의 통일론이건, 시민사회의 재형성과 풀뿌리 공동체의 재형성을 기본시각으로 넣지 않고 있다면, 아무리 국제정치의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신사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은 이른바 세력균형의 국제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문제는 다시 국가를 넘어선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통일 논의 또한 우리가 한국 사회를 진정으로 어떤 사회로 바꾸어야 하는지, 거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주의 시각을 넘어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분명 다르다. 서구의 근대 민족주의 이론과 국가 이론을 수입해야만 했던 우리의 처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혼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강한 민족주의 시각의 통일론은 결국에는 강한 국가주의 통일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김구, 나의 소원

  
  우리는 어떤 사회, 어떤 국가에서 살아야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억압과 착취도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김구가 말하는 문화의 나라,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한 군사력만 유지하고 모든 인민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와 나라는 불가능할 것일까.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이상은 그런 사회와 나라가 실현가능하다고 궁극에는 국가는 소멸하고야 만다고 혁명을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로 돌아가고 남은 것은 벌거벗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만 종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우리는 국가가 아닌 부족 공동체 사회라고 해서 전혀 전쟁이 없는 지상낙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마을공동체조차 마을과 마을의 싸움이 늘상 존재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정월 대보름 이웃 마을 젊은이들끼리 벌였던 쥐불놀이 싸움에도 그런 잔영은 남아 있다. 뉴기니의 밀림 안에서도 부족간 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아마존 밀림에서 야노마뫼족을 조사했던 프랑스 인류학자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부족간 전쟁의 원인을 여자로 보기도 했다. 무엇이 되었건 인간 사회와 사회 사이에는 늘 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전쟁은 어쩌면 사회생물학자들의 지적대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공격성의 발로로서 인간과 사회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사회 속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관리할 수 있는 사회체제와 국가를 기획해야 한다.
  
  더 부연할 것도 없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한 질주는 종말을 향해 마지막 속도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견인차였던 화석연료와 각종의 천연자원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광풍 아래 급격하게 고갈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김구가 나의 소원을 말하던 1940년대 세계 인구가 20억 명이었다는 새삼스런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끔찍하고도 어지러운 무한제곱 차원의 자원 착취 실태는 그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그리고 이런 무한 경제성장과 개발을 주도하는 것이 다름아닌 국가이다. 그것도 국가의 주도권이 인민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 있는 이른바 시장국가이다. 대부분의 미국과 서구 유럽, 일본과 한국 등 이른바 경제 선진국들의 노동자들은 기업에 종속된 노예로서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혜택에 푹 빠져버린 배부른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 세력이라고까지 지칭되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풍요를 누구보다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성장론자들, 가장 강력한 환경파괴론자들이 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이 점에서 시민사회운동을 기반으로 평화운동 단체들이 평화국가 구상을 제안한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평화국가론은 평화냐 통일이냐, 자주냐 동맹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새로운 시각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특히 남북한 군사력 문제를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문제의 근원으로 직접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평화국가 구상은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극복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도 지금은 세계 최강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건국 초기에는 코스타리카, 파나마, 산마리노 공화국,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바티칸, 사모아 등처럼 상비군이 없는 국가였다. 오늘날 미국의 군사력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군사력, 거기에 핵과 장거리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과 한국의 군사력 등등을 생각하면 한반도는 사실상 폭탄으로 뒤덮힌 금수강산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게다가 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국제정치 공학과 살벌한 적대의식까지 더하면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신기할 지경이다.
  
  이런 지뢰밭 속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단지 남북간 평화협정을 맺고 군사력을 동결하는 현상유지 정책으로는 불가능하다. 평화국가론은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개입과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평화헌법 구상, 정치문화와 사회경제의 평화 체제 정착을 근간으로 한 국가의 존재양식 전환 등등 다분히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의제를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통일론과 확연히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전히 평화국가론 또한 사민주의의 복지국가 개념과 유사한 지속가능한 발전 국가 모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무기에 꽃을 매다는 게 아니라 무기 자체를 호미로 바꾸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에 와 있다는 자각을 해야 한다. 근본주의보다도 더 근본의 해결책을 현실에서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시기라는 인식이 없는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남의 일처럼 구경하고 있는 필리핀에서 이집트까지의 식량폭동은 조만간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들이닥칠 지도 모를 쓰나미이자 지진이다. 그 때 우리 사회가,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손쉬운 해결책을 파시즘밖에 없다. 남한의 식량자급율이 25%인데 견주어 북한의 식량자급율은 60%를 넘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의 몰락으로 똑같이 석유공급 중단이라는 에너지위기에 직면해서 북한과 큐바가 석유농업인가 유기농업인가 선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물론 국가 정치지도자들의 선택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지역의 농업 공동체가 살아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점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국가를 뛰어넘는 시각이 요청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동체 사회를 향하여
  
  이런 상황에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회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중독 증세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연합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어떤 새로운 사회의 기획이건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노예의 중독자들이 아니라 각성한 자유인들이다.
  
  에너지 위기와 식량위기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회전환의 출발점은 다름아닌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이다. 공동체의 재구성이야말로 국가 중심의 사고, 국가 차원의 온갖 정책과 이론을 탈피해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 나갈 수 있는 탈석유 사회의 지름길이다. 해답이 나오지 않는 국가주의 사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현실주의의 시각으로 국가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공동체 사회의 재구성이다. 자본주의가 해체한 농업공동체의 재구성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아킬레스 건을 끊는 자본주의 극복의 핵심이다. 그리고 전쟁국가로 끊임없이 치닫는 국가를 넘어서서 새로운 상상력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상상력의 민주화도 이런 공동체의 재구성에서부터 시작된다.
  
  공동체 사회에서 국가란 공동체의 연합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 앞에서 현실의 국가 역할을 부정할 수가 없다. 다만 국가가 또다시 억압과 폭력으로 기능하지 않게끔 사회 안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제동장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 속에서의 노예와 같은 파편화된 삶을 살 것인지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 사회 속에서 다채로운 삶을 살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농업은 산업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 형성의 기본 토대이다. 지역에서 에너지와 식량의 자립을 기초로 형성되는 지역 공동체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주춧돌이자 근거지이다. 소농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공동체를 근거지로 도시와 연결된 각종의 공동체 네트워크는 우리 사회를 쉽게 파시즘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철조망이 될 것이다.
  
  공동체는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닥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오아시스이자 새로운 인간관계의 열린 광장이다. 오직 기업만이 자본과 효율을 무기로 자연과 인간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이 자살문명을 막을 유일한 브레이크는 공동체 뿐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에너지-식량 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경쟁과 살벌한 투쟁의 시장만능주의에서 과감하게 이탈해서 우애와 협동, 협력의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재구성해나가야 한다.
  
  5월에서 6월로 끈질기게 이어지면서 더욱 거세지는 촛불대장정의 힘은 바로 이같은 온라인 코뮤니티였음을 상기하자. 촛불 시위에서 보듯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은 잘 짜여진 국가 차원의 대의제도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형성된 자유인들의 연합체, 풀뿌리 공동체들이다.
  
  한국 시민사회 속에서 민주주의의 자립과 자치를 실현하는 공동체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바 수많은 국가주의의 폐단과 국가주의 사고의 감옥, 군사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사상과 실천의 토대가 이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발은 이미 과잉을 넘어 위험하다. 우리의 경제성장과 풍요는 이미 높음을 넘어 위험한 범죄이다. 우리의 군사력은 이미 강대할 정도를 넘어 지속불가능한 낭비이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거대 강국, 거대 군사력 사이에서 남북한이 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적정한 경제성장과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하며 그에 상응하는 방어력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은 이른바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순환론이다.
  
  우리는 이런 순환론을 깨야만 하며 깰 수 있는 밑으로터의 힘은 국가주의의 포로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된 수많은 공동체의 형성밖에 다른 길이 없다. 수많은 풀뿌리 공동체들의 자립과 자치는 민주주의의 무너질 수 없는 확고한 기둥일뿐더러 그것 자체가 현존의 국가 체제와 국제정치 질서 속에서 국가를 손쉽게 다른 제국주의 국가나 다국적기업에 판매하거나 종속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버팀목이다. 무수히 많은 지역 자립 자치 공동체와 다양한 층위의 공동체들은 국가로부터 독립된 생활세계의 터전일뿐더러 그것 자체가 국가를 국가주의로 치닫지 못하게 만드는 높은 방지턱이다.
  
  북한을 부정하고 북한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출하고자 하는 세력도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도 지금의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반도 분단의 극복과 통일은 그러므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 다른 길은 새로운 사회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우리의 기획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지금 개성 공단이 상징하는 바 남한의 자본주의 생산력이 북한으로 밀고 들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교류협력의 분위기가 경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냉전 체제 당시와는 확연하게 다르게 여전히 남북간 경제교류는 지속되고 있다. 긴급 식량지원 뿐만이 아니라 북한은 경제개발과 성장에 필요한 어떠한 남한의 자본과 기술도 도입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 대안의 프로젝트, 생태순환 농업과 대안의 생산체제, 재생가능 에너지와 대안의 사회가 수용될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실생활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된다. 심지어는 효도도 돈으로 환산되고 애인도 얼마짜리인지 가격으로 표시된다. 중국 사회주의를 남한보다도 더한 중국 자본주의로 변질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는 참으로 풍요롭고 강력한 매혹의 체제이다. 그렇다면 남북간 평화를 내세우며 북한에 밀물처럼 들어가는 미국과 남한의 자본주의를 북한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과연 자본주의가 진전되면 중국과 북한에도 지역 농업공동체, 수많은 다양한 온오프 공동체들이 재형성될 수 있을까.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을 받아들이든 최장집의 민주 정당정치 확립과 평화공존을 수용하건, 남과 북이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반쪽의 국가, 체제이든 이미 근대화되고 자족가능한 완성된 하나의 국가, 하나의 체제이든 국가는 우리에게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국가의 시각을 버릴 수도 없으며,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국들의 정책과 동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국가주의의 실천과 공동체주의의 실천은 그 목표와 실천 방식까지 근본에서부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국가 차원을 넘어서는 우리 나름의 실천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남북이 분단된 이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명제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남한은 북한 공산독재 체제의 학정에 신음하고 있는 북한 주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리고 북한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인 남조선 괴뢰정부의 폭압과 착취에서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이런 국가주의 통일론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영혼이자 한 사람의 고귀한 공동체 구성원이다. 이제 우리의 앞길에는 일찍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던 시원의 사회, 우애와 협력의 공동체 재구성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 이 길만이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면, 이 방식만이 국가주의를 넘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