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를 자주 오가는 사람이라면, 도쿄의 현관에 해당되는 나리타(成田)공항의 기묘함에 당황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공항은 대부분 티케팅을 하고 짐을 맡기고 수하물을 들고 짐 검사를 받은 다음 출입국 수속을 하는데, 나리타공항은 기묘하게도 지하철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가는 입구(공항 입구)에서 신분증 검사와 경우에 따라서는 짐 검사를 받는다. 그리고 공항 안에서 다시 같은 검사를 받는다. 공항 안에서도 검사를 받지만 그 전에 공항 입구에서도 검사를 받는 것이다. 결국 두 번이나 검사를 받는 것이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가도 마찬가지이다. 공항 입구 검문소에서 버스는 검문을 받는다. 경찰관이 버스에 올라타서 여권 등을 검사한다. 그리고 거의 반드시 검사관 옆에 짙은 청색 제복을 입고 헬멧을 쓴 기동대 복장의 경찰이 매서운 눈초리로 자기 키만한 긴 목봉을 들고 위압적인 태도로 서 있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처럼 공항 경비가 엄중한 것은 2002년 9.11 사건 이후가 아니다. 나리타공항의 경우는 1978년 공항 개항 이래 줄곧 반복되어 온 광경이다. 80년대만 해도 마치 계엄령 같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80년대 한국에 관광 온 일본인들이 서울의 전투경찰이나 군인들을 보고 한국의 엄혹한 정치현실에 긴장했다는 소리를 할 때마다, 나는 '왜 당신들은 일본 나리타의 계엄령 상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라고 반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는 공항 건설을 둘러싼 정부와 농민의 대립 때문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나리타 투쟁' 혹은 실제로 활주로로 사용된 지역의 지명을 따서 '산리즈카(三里塚) 투쟁'이라고 부른다. 1966년 일본 정부가 나리타에 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이후, 나리타를 둘러싼 대립 상태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겼으면서도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검문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퇴거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여전히 활주로의 거의 한 가운데에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원래 예정했던 5개의 활주로 중, 실제로 완성되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잠정 활주로 한 개를 포함해 두 개뿐이고, 따라서 착륙한 비행기는 좁은 유도로를 거쳐 터미널까지 이동해야 한다. 농가 바로 위로 비행기가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고, 농가는 높은 펜스로 둘러싸여 활주로 속에 마치 섬 같이 고립되어 있다.
이 곳 농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공항을 지키는 높은 철탑 검문소의 카메라 세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곳곳에서 나타나는 무장 경찰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지난 40여 년 동안 나리타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많은 농민, 학생, 경찰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다쳤다.
도쿄대학 교수로 나리타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부미(宇沢弘文, 1928- )는 나리타공항을 둘러싼 대립을 '일본 전후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표현한다. 필자는 나리타 문제를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시금석'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서적은 거의 없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일본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고 그 상처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오랜 기간 동안의 싸움을 '객관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이 현재로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투쟁의 주체가 현지 농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과격파 학생'들의 '과격한 싸움'으로만 인식되어 일본 학생운동 급진화의 한 사례로만 '소비'되어 왔다는 현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좌파 정당을 대표하는 일본 공산당이 초기에 이 싸움에 관여하다가, 오직 투쟁을 선거운동의 전술로만 이해하는 오류를 범해 현지 농민들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진보적인 학자가 서술한 일본 현대사 책을 보아도, 나리타 문제는 거의 언급이 없거나, 있더라도 일본 학생들의 급진 운동의 실패사례로만 서술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나리타 투쟁과 세대
이런 점에서 보면 만화가 오제 아키라(尾瀬あきら, 1947- )가 그린 <우리 마을 이야기>(ぼくの村の話)(전7권, 1993년)는 나리타 산리즈카에 대한 입문서로 아주 귀중한 책이다. 오제 아키라는 1985년에 제31회 소학관(小學館) 만화상을 수상했고, 한국에도 <명가의 술>(夏子の酒)이나 <온 사이트> 같은 작품이 번역 소개되어 있는 중견 만화가이지만, 그가 나리타 산리즈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 마을 이야기>는 실제로 이미 절판이 되어 구하기 어려운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만화책의 뛰어난 점은 나리타 산리즈카 투쟁을 철저히 현지 농민의 '생활'이라는 시각에서 재구성했다는 점에 있다. 나리타 산리즈카 문제를 다룬 책들이 좌파의 정형화된 전문용어를 동원해 자신의 정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거나 개인적인 소회나 경험으로 일관되어 있어 투쟁의 전체적인 전망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이 책은 '있었던 사실'을 농민의 생활자적인 입장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농토 지키기=사유재산 지키기=공공성을 무시한 농민 이기주의라는 시선을 넘어서 농민들의 공항반대 운동에 농업 지키기, 반(反)개발주의, 생태주의적 시각을 부여하고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농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려가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세대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첫째 세대는 19세기 말에 태어난 노인 세대이다. 일본에서 흔히 '고집 센 세대'로 알려진 메이지 태생의 노인들은 개발주의에 밀려난 대가족주의의 '가장'으로 '낡은 세대'를 대표한다. 이들의 검소하고 공동체적이며 장남 우선주의의 생존방식은 국제공항이라는 일본의 개발주의를 상징하는 첨단 문명과 가장 대척점에 자리한다.
이들은 아침에 농작업이나 반대 데모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집 안에 걸려 있는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에 경례한다. 이들은 공항 건설 예정지가 메이지 천황이 건설한 고료(御料) 목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천황이 조성한 이 '성스러운' 땅을 없앨 수 없을 것이라는 전 근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국 배반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들은 노인행동대와 노인결사대를 결성하고 싸움에 나선다. 젊은 청년들이 쇠몽둥이나 화염병 같은, 대학생들에게 배운 도시적인 무기로 저항하지만 이들은 바가지에 가득 채운 분뇨를 기동대에 뿌려대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화염병이나 쇠몽둥이가 도시의 저항문화라면 분뇨는 가장 농민스러운 저항 수단인 것이다.
사실 일본 정부가 산리즈카에 공항을 건설하기로 한 것은 이곳에 고료 목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료 목장은 일종의 국유지이어서 토지수용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고료 목장은 일본 정부에게는 토지수용의 용이함의 근거로, 노인들에게는 일본 정부가 토지 수용을 쉽사리 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로 각기 다르게 작동한 것이다. 천황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두 번째는 1960년대에 40~50대를 맞이한 세대이다. 이들은 청년기에 전쟁을 경험했고, 농지개혁 이후에 이곳 산리즈카에 들어와 척박한 땅을 비옥한 흙으로 바꾼 세대이다. 실제로 산리즈카의 농민은 주로 만주나 오키나와에서 이주해와 새롭게 이곳에 터전을 일군 개척농민들이다. 원주민이 아닌 셈이다.
이들은 전전의 고통스러운 빈곤(소작농)의 경험을 기억으로 가지고 있으며 전후 농지 개혁을 통해 분배받은 땅을 일구어 자작농으로 거듭난 세대이다. 그러나 이들이 땅으로 거듭난 1960년대에 일본은 이미 고도성장에 들어가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 세대는 개발주의에 밀려 도시 하층노동자로 편입되거나 아니면 도시와의 격차를 감수하면서 농촌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장남이다. 이들은 대가족주의와 농촌공동체를 지키는 마지막 세대를 대표한다. 이들은 '공항건설 반대 동맹'을 결성해 투쟁의 주체로 등장한다.
세 번째 세대는 전후에 태어난 소위 단카이(団塊) 세대이다. 1966년 무렵에 주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을 맞이한 이들은 고도성장의 입구에 서있는 세대이다. 도시에 나가기만 하면 일자리는 널려 있다. 농촌 탈출을 꿈꾸는 세대이다. 실제로 만화에서도 대학 진학을 위해, 혹은 취업을 위해 대도시로 가출하려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싸움을 통해 탈출을 단념한다. 그리고 산리즈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이들은 공항 건설이 결정되면서 싸움에 주체적으로 관여해나가는 '주체의 성장'을 이루어 낸다.
투쟁이 곧 발견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각 세대들의 '고민'과 '성장'이 순조로운 것만 아니다. 마지막까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들과, 빈곤 등의 사정 때문에 결국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땅을 팔고 이곳을 떠나게 되는 농민과의 갈등은 이 만화의 가장 중요한 플롯(plot)이다.
특히 땅을 제공하는 대가로 막대한 보상금을 챙겨 빈곤한 농민에서 갑자기 현대적인 가옥, 자가용, 컬러TV를 갖춘 소비사회의 '주역'으로 탈바꿈하는 동료 농민의 '변신'과 이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불편한 시선은 산리즈카 투쟁이 단순히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1966년 이후 약 2년 만에 농가의 거의 90%가 정부의 압력에 굴해 땅을 내놓게 된다. 따라서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는 농민과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는 농민 모두가 산리즈카 투쟁의 본래의 모습인 것이다.
이 과정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나리타공항에 인접한 아시오(足尾)에서 구리 광산의 공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현지에 들어가 농민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투쟁했던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가 말한 '신산입가경(辛酸入佳境)'을 생각하게 만든다. 다나카는 '신산입가경'을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고생 그 과정 자체가 새로운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투쟁 과정에서 얻게 되는 고민, 우여곡절, 고통이 곧 발견이며, 따라서 싸움의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 투쟁은 1995년에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일본 정부를 대표해 사죄발언을 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물론 이 사죄 결정을 둘러싸고 반대동맹은 또 한 번의 분열을 경험하게 되지만, 일방적이고 강권적인 정부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가의 굴복'인 셈이다. 정부 사죄에 대해 반대 동맹 사무국장인 이시게 히로미치(石毛博道)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1966년에 (이 같은 사죄가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그 동안 경험한 말할 수 없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경찰관이 목숨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또 귀중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리타 산리즈카 공항 반대운동은 일본 정부의 공공정책 추진 방식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주민 동의를 얻기 위한 치밀하고도 장기적인 과정을 반드시 동반하게 되었다. 또 독일은 뮌헨공항을 건설하는 데 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리타의 사례를 장기간에 걸쳐서 학습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시즈오카(静岡) 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대립은 나리타의 경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토지수용 절차, 환경 파괴, 개발주의라는 점에서 보면 시즈오카 공항 건설도 나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발주의는 '당연하게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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