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우주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우주의 구조와 기원, 진화 등에 대해 논의하였죠.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등 존재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우주가 펼쳐져 나가는 모습은 결국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마지막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일부로서 인간은 우주라는 시공간의 규모에서 보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존재 같지만 놀랍게도 우주 전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에서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먼저 시간과 우주를 살펴보고, 우주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과정을 되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우주와 관련해서 시간되짚기 문제를 논의하고 자연과학을 통한 우주 해석의 의미를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시간과 우주
시간은 흔히 화살로 표현합니다. 영어에도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Time flies like an arrow)"는 격언이 있지요. 미래와 과거가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시간의 의미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미래와 과거는 분명히 다르지요. 우리는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미래를 기억한다는, 곧 예측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기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미아리고개에 많았는데 요즘에는 무슨 교회에도 많은 듯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다시 어려지지 않고 나는 유감스럽게도 늙어가기만 하지 다시 젊어지지는 못합니다. 나도 여러분 같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기는 사실 나이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젊었을 때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새로이 즐길 수 있는 삶도 있지요.
어쨌든 시간을 화살에 비유하는 것은 방향을 지녔다, 곧 미래와 과거가 다르다는 뜻인데, 이는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기본적 이론체계, 곧 동역학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고전역학 체계도 시간에 대해서 대칭입니다. 곧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어요. 앞 강의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공을 던져서 날아가는 거동을 비디오카메라로 찍고 그 결과를 거꾸로 돌려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주어진 힘에 대한 가속도로 표현되는데 위치를 시간에 대해 두 번 미분한 가속도는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도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운동의 법칙은 시간되짚기에 대해 꼴이 바뀌지 않으며, 이는 고전역학에서 미래와 과거의 구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슈뢰딩거방정식에서 시간을 되짚으면 부호가 바뀌지만 복소켤레를 택하면 원래 부호로 돌아오므로 역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태함수와 그 복소켤레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확률은 절대값의 제곱으로 주어지므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상태를 규정짓는 이론체계인 동역학은 시간에 대한 대칭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시간화살이 없지요. 그런데 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의 일상에는 명백하게 시간되짚기에 대해 대칭이 없는 현상이 많습니다. 이러한 시간화살이 존재하는 현상, 예컨대 우리 몸과 생명을 비롯한 일상은 많은 수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뭇알갱이계의 현상입니다.
시간의 화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러한 뭇알갱이계에 존재하는 열역학적 화살(thermodynamic arrow)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기억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뜻하는 심리적 화살(psychological arrow)을 들 수 있겠고, 마지막으로 우주가 불어나고 있음에 해당하는 우주론적 화살(cosmological arrow)이 있습니다.
열역학적 화살은 앞서 여러 번 논의했던 열역학 둘째 법칙이 주는 것입니다. 엔트로피가 저절로 감소할 수 없다는 것이 시간의 화살을 정해주지요. 강의실에서 향수병을 열면 향기가 저절로 밖으로 퍼져나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반대 과정, 곧 향기가 다시 모여서 향수병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니,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열역학적 화살이지요.
심리적 화살을 거스른다는 신들린 사람이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미래를 기억(예측)하지 못하므로 심리적 화살이 있지요. 그런데 사실 심리적 화살은 열역학적 화살 때문에 생기므로 결국 열역학적 화살의 한 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만 기억하고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죠? 기억이란 무엇입니까? 두뇌에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보란 엔트로피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음의 엔트로피입니다. 곧 엔트로피는 모자라는 정보이죠. 그러니까 정보를 저장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엔트로피 증가를 수반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심리적 화살은 열역학 둘째법칙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심리적 화살은 열역학적 화살의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래를 기억한다는 사람은 자연법칙 중에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한 열역학 둘째법칙을 위배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열역학적 화살로 돌아와서 둘째법칙을 살펴보지요. 둘째법칙에 따르면 외떨어진 계의 엔트로피는 계속 늘어나므로 결국 최대가 되면 더 이상 변하지 않게 됩니다. 열평형 상태라고 부르지요. 이는 주어진 조건에서 정보가 가장 모자라는 상태를 말합니다. 엔트로피가 최대라면 접근가능상태가 가장 많은 경우로서,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지요. 가능한 상태가 매우 많고 그 중에 어느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만큼 정돈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물질이 고르게 섞여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공기나 우리 몸이나 구분이 없이 물질이 모두 균질해야 하므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우리를 비롯한 생명체는 외떨어진 계가 아닙니다. 바깥세상, 곧 환경과 끊임없이 물질과 에너지 및 정보를 주고받으므로 열역학 둘째법칙을 어기지 않고 열평형에 도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구도 외떨어진 계는 아닙니다. 해에게서 에너지를 받고 있으므로 열평형 상태에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열역학 둘째법칙은 외떨어진 계에만 적용됩니다. 그러면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외떨어진 계는 과연 어디 있을까요?
엄밀한 의미에서 외떨어진 계는 바깥세상을 가지지 않은 전체우주 뿐입니다. 따라서 우주에는 둘째법칙이 적용되고 이에 따라 엔트로피가 최대인 열평형 상태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 전체에 물질이 고르게 섞여져야 하므로 은하도 별도 지구도, 그리고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이러한 상태가 바로 우주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암울한 우주의 미래인데, 이를 열죽음(heat death)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현재의 우주는 열죽음 상태는 분명히 아닙니다. 우주는 아직 열평형에 도달하지 않았고, 엔트로피가 상당히 작아서 은하도 있고 별도 있고 생명체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왜 엔트로피가 작을까요? 우주가 꽤 나이가 많은데 왜 아직도 열평형에 도달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열역학적 화살로 대표되는 시간의 화살이 결국 우주의 문제로 귀착됨을 제시합니다.
우주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으로 파동에 관련된 시간화살도 들 수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되나요? 파문이 일지요. 이를 캠코더로 찍어서 거꾸로 돌리면 어떻게 보일까요? 갑자기 사방 호숫가에서 물결이 일어서 가운데로 모여들더니 가운데서 돌이 하나 튀어 오르게 됩니다. 그런 것 본 적이 있어요? 없죠? 파동의 진행에서도 역시 시간의 화살이 있는 것 같네요. 일반적으로 파동방정식을 풀면 시간되짚기 풀이도 얻어지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는 결국 우주의 둘레조건에 따라 정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역학 둘째법칙과 시간의 화살은 우주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주가 탄생할 때 엔트로피가 작은 상태에서 출발하였고, 증가해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가 아직 열평형에 다다르지 않은 이유는 우주가 계속 불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만일 멈춰져 있었다면 일찌감치 열평형이 되어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 등 생명이 존재하고 별과 은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정지우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다행히 우주가 불어나고 있기 때문에 열죽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열역학적 화살도 우주론적 화살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네요.
태초에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탄생했는데 스스로 지켜야 할 규칙, 물리법칙이라고 표현하는 규칙을 선택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뉴턴의 운동방정식이나 슈뢰딩거방정식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선택했고, 이에 더해 초기조건도 우주가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에 따라 우주는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누가, 왜 선택했느냐는 것은 수수께끼지요. 아무튼 우주는 다행히도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를 초기조건으로 선택했고, 일반상대론의 마당방정식에 따라 계속 불어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규칙에 대해서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우주에서 가능한 규칙이 사실은 한 가지 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앞에서 논의했지만 '모든 것의 이론(TO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초끈이론이 그러한 역할을 하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몇 해 전에 해외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초청강연을 했는데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노벨상 받은 사람들도 여럿 참석했는데 한 분의 강연 제목이 "모든 것의 이론은 어떤 한 가지의 이론이라도 될 수 있는가(Is theory of everything theory of anything?)"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것은 과연 어느 한 가지라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되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이론(TON)인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모든 것의 이론을 믿는다면 우주를 기술하는 이론은 한 가지이고 우주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초기조건은 어떻게 된 것이냐, 우주가 초기조건은 왜 하필 그렇게 결정했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초기조건도 선택의 여지가 없이 둘레가 없는 초기조건으로 정해졌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호킹의 의견이지요.
글쎄요, 설사 이를 받아들인다 해도 최후의 수수께끼는 남습니다. 만일에 우주의 진화를 결정하는 시간 펼쳐짐을 지배하는 법칙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할 필요가 없고, 우주의 초기조건도 한 가지라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도대체 우주는 왜 존재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번거로운데, 왜 우주가 스스로 존재의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는 진정한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코의 작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원래 제목은 소설과 같았는데 우리말로 희한하게 번역했지요. 영화 제목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번역했으니, 참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해야 할까요?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 동유럽이 소련의 정치, 경제 블록 안에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자 노선을 걷다가 소련의 침공으로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소련이 침공하기 전의 잠깐 동안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렀지요. 그것은 물론 서구의 시각에서 본 것입니다. 아무튼 소련이 침공한 상황에서 마치 공산주의에 맞서서 싸우는 걸 그린 영화라는 식으로 왜곡되게 해석해서 그렇게 붙였습니다. 실제로는 '프라하의 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정확한 제목입니다. 좋은 작품으로 기회가 생기면 보라고 권합니다.
이를 본떠서 1980년 5월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던 것 압니까? 이제 5월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지난주에 5월 18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5월 1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나요? 요즘 대부분 학생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1980년이라고 하면 아직 30년도 되지 않았네요. 오래 전이라면 오래 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의 입장에서는 30년 전이면 결코 오래 전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과 30년 만에 그렇게 망각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믿기 힘듭니다. 내가 여러분 같을 때였죠. 처절하고 치열한 삶과 죽음의 문제였는데 불과 20여년 사이에 이렇게 잊어져서 대학 캠퍼스에서는 축제 마당이 되어버렸네요. 치열한 삶의 문제였는데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되어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5월의 캠퍼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연재기사는 지난 2008년 12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책갈피 출판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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