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6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한 노심초사로 인해 밥상안전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던 것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나 국가경제야말로 바로 밥상과 그 안전 문제 아닌가?
서민들의 밥상에 무엇이 오르는가를 따지는 것이........
서민들의 밥상에 무엇이 오를지를 따지는 것이 국가경제의 기본이다. 이걸 기본으로 고민하지 않은 국가경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한-미 FTA를 향한 줄달음에 이 밥상문제는 도외시되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한-미 FTA의 본질을 말해준다. 그것은 서민들의 밥상과 관계없는 대자본의 잔칫상이다.
한편, 미국 민주당 오바마가 한-미 FTA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의 이야기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국 자동차 시장에 미국 자동차 진입 문을 확대하라, 둘째, 노동조건을 국제기준에 맞추라, 셋째, 환경규제 강화하라.
오바마의 주장을 왜곡하지 마라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우리도 이미 국내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바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능멸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전제 위에 들어오는 초국적 대자본은 우리도 반갑지 않다. 그건 노동자에 대한 착취강도를 높이고 환경을 붕괴시키는 괴물일 뿐이다.
저렴한 노동가격과 환경비용 부담 경감을 내세운 대자본의 이동에 따른 실업과 노동자들의 임금협상력 약화는 이들 노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의 지지를 받는 오바마로서 당연한 주장이다.
첫 번째 자동차 시장 문제도,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한국 자동차 진입로를 봉쇄하거나 제약하는 이야기라면 오바마의 주장은 우리에게 위협적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미국 자동차 진입에 대한 공세다. 그건 서민들의 삶과는 그리 크게 관계없는 고가 대형 자동차 시장의 영역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걸로 집권세력은 서민들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명백한 기만이다.
시장의 공공성 회복 주장, 그 철학 우리도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오바마는 미국 시장 자본주의에 공공성의 가치를 회복하겠다고 나선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철학을 공유하면서 한-미 FTA를 재협상한다면 우리에게 꿀릴 것이 없다. 지금의 한-미 FTA는 그 공공성을 거의 완전히 분쇄시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거의 모든 비판자들이 지적하듯, 단 한 가지로 요약된다. "미국에 신뢰를 가지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같은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믿을 만한 미국이 마늘파동과 관련한 중국처럼 통상보복을 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얼굴을 두 개 가진 메두사의 미국인가?
미국은 믿어도 되는가, 두려워해야 하나?
그렇다면 무슨 말이 되는 것일까? 더 이상 재협상이요 뭐요 하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미국이 알아서 해줄 것이며 이를 믿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자꾸 뭐라고 하면 보복조치가 이어져 우리는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명확히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협상에는 상대가 있고, 그 상대가 어떤 존재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다. 미국은 믿어도 되는 존재 쪽인가, 아니면 두려운 존재인가?
신뢰를 기초로 하는 것은 우호적 관계다. 보복을 전제로 하는 두려움이 전제 되어 있다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굴복이다. 서로 모순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미국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이 과연 믿을 만한 존재인가를 따지는 일도 있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위험도가 높은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우리의 선택권이 기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재협상은 원안의 파기를 전제로 한다. 추가협상은 원안을 보완하는 것이다. 추가협상은 원안의 원칙을 압도할 수 있는 보완장치는 불가능하다.
재협상, 우리의 국제위상 높여
바로 여기에 재협상의 의미가 있다. 협상의 원안에 들어 있는 핵심은 쇠고기 모든 부위 수입, 검역주도권 미국, 두 가지다. 이걸 그대로 놓아둔 상황에서 다른 보완조치는 모두 미국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광우병 소지가 높은 쇠고기 수입을 검역주권 포기를 기초로 한 협상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높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이를 재정리하고 광우병 소지를 완전 제거한 협상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판을 바꾸는 길일까? 답은 분명하다.
물건이 부족하다면 모를까, 차고 넘칠 경우 사는 자와 파는 자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그런데 이 쇠고기 협상이 이토록 문제가 되는 것은 갑의 권리를 정부가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권리의 문제를 넘어서서 치명적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점에 그 논란의 핵심이 있다.
서민의 밥상은 갈수록 초라해질 것이다
몸은 숙이고 있으나 거짓이 난무한다. 한쪽에서는 기만이, 다른 한쪽에서는 고도의 탄압이 진행되고 있다. 언론에 대한 장악과 공공부문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계속 강화되고 있다. 그러면서 서민의 밥상은 갈수록 초라해질 것이다.
이명박 식 신자유주의 밀어붙이기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방식만 교체할 뿐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장은 따라서 철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는 순간, 시민 민주주의의 승리는 멀어져 갈 것이다.
대운하 일단 포기는 시민 민주주의의 직접행동이 가져온 정치적 승리의 일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우리가 가진 힘과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면 기다리는 것은 패배다.
가자, 천리 길. 굽이굽이 쳐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우리들의 땅에 우리가 간다. 역사는 그렇게 끈질기게 진군하는 자에게 승리를 안긴다. 우리는 이제 막 이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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