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냄비근성이란 허황된 말이다. 쉽게 끓고 식는 성향이 민족성 따위에 잠재할 이유도 근거도 없다. 이 말은 애초 정권과 언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제 혼자 알아서 작동한다. 마치 숙명처럼 사용되면서 마침내 하나의 프레임을 구성한 것이다. 냄비근성 프레임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 이라는 자조와 비관을 시민 개개인에 전파해냈다. 이 말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저 한 없이 처연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원래 그렇지 뭐. 말이란 대개 그렇게 무섭다.
한국 사람들이 쉽게 끓고 식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원래 쉽게 끓고 식을 수밖에 없는 사안들에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독도가 그랬고 태안이 그랬고 사회 주변부에 관련한 기타 현안들이 그랬다. 대중은 대의와 구호에 따라 쉽게 움직인다. 이 구호가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대의와 구호로 작동된 대중은 금방 지친다. 당연한 수순이다. 절박함의 무게란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강요된 행동은 주기가 짧다. 그건 민족성이나 인간성의 문제라기보다 정교함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라는 말은 해당 사안의 냄비근성이라는 말로 수정돼야 옳다. 그간의 정권과 언론은 이 같은 작동방식을 잘 이해하고 이용해왔다. 종종 불을 붙이고 실컷 이용한 다음 알아서 진화되길 기다렸다. 진화되면 냄비근성을 성토하며 기사를 팔아먹을 수 있으니 또한 이로웠다.
그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여태 냄비근성 프레임의 수혜를 누려온 많은 자들이 지금 이 시간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촛불이 좀체 꺼지질 않는 것이다. 무려 45일이 지났다. 우석훈의 표현대로 촛불은 횃불이 됐고 이미 들불로 옮겨 붙는 형세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냄비근성 프레임이 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느냐 불평 삼을 정도다. 이를테면 이문열은 17일 오전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촛불 시위에 반대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촛불장난을 너무 오래하는 것 같다. 불장난 오래하다 보면 결국 데이게 된다." 군대를 동원하자는 조갑제의 주장에 버금갈 만큼 화려한 문학적 불장난이다.
촛불이 오래 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번 시위의 유례 없는 성격이다. 요번만큼은 불을 놓은 게 정권과 언론이 아니다. 특정 시민단체도 주사파 빨갱이도 학생도 옆집 아저씨도 아니다. 누가 놓았느냐.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유가 너무 많다. 자기 건강에 대한 안위 때문이다. 경제 살린다고 해서 못 생겨도 꾹 참고 뽑아주었더니 몇 달 사이 더욱 더 홀쭉해진 내 주머니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권의 빤한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적 배신감 때문이다. 전경들에 의해 무참히 진압당하는 시민들의 사진과 동영상, 그러니까 이미지 때문이다. 요컨대 헤아리지 못할 만큼 다양한 배후가 존재한다. 애초 대의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닌 것이다. 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생적일 수 있었다. 금방 식을래야 식을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이 정권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공간을 초월한 바보라는 사실이다. 영어몰입교육으로 어륀지 껍질을 벗기다가도 영문 해석을 잘못해 국제협상에 실패했다는 실용정부다. 이들은 그나마 냄비근성 프레임이라도 활용할 줄 알았던 지난 정권들에 비해, 무슨 표현이 적당할까, 아니 그저 아무 생각이 없다. 그래서 장마도 왔는데 슬슬 식어볼까 싶으면 기름을 붓는다. 성난 시민을 금방 그칠 소나기로 비유하거나 어청수 같은 비슷한 수준의 2중대를 동원해 개념 없는 강경 진압을 일삼는다. 대국민 사과를 한다면서 연단 위에 올라 간디 흉내를 내며 물레를 돌리다가도, OECD 장관회의 개막식에서는 "(인터넷의 힘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가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너무 멍청하다. 정치적 셈도 수도 없다. 그저 시민을 자극할 뿐이다. 배후가 하나라면 그건 대통령이다. 이제는 심지어 순수해보이기까지 한다. 문득 영구 흉내를 내도 그러려니. 올라가는 밥숟갈조차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음 쟤 또 그러는군.
이 정부의 모든 문제는 돈에 의해 시작되고 돈에 의해 발전됐으며 돈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물론 모두에게 돌아갈 돈은 아니다. 일부 특권층의 사익에 종사하는 돈이다. 민영화 방침부터 한미 FTA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다. 광우병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보수-진보 사이 다툼의 프레임으로 가져가려는 시도가 비일비재하다. 하나하나가 의외로 꽤 정교한 말장난이었다. 과연 이에 넘어간 보수단체의 집회가 맞불식으로 이어졌다. 이 또한 아무래도 정부의 생각은 아니다. 이 정부에는 그럴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 이것은 기존 주류 보수언론과 퇴물들의 전략에 더 가깝다.
이를테면 오늘 있었던 이문열의 촛불장난 이야기가 그렇다. 이문열이나 조갑제 같은 퇴물 보수주의자, 그리고 정론을 가장한 사론지들이 지금의 구도 안에서 구체적인 실익을 얻고 힘을 도모하고자 의도적으로 문자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등돌린 민심의 절반을 이데올로기 논쟁삼아 제 편으로 끌어오려는 것이다. 보수진영 결집을 명분 삼아 자기들 좀 봐달라는 것이다. 정치적 셈이다. 부화뇌동 할 필요가 없다. 화내면 지는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촛불은 계속될 것이다. 촛불의 성격을 어떻게 유지하고 정교하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선 별도의 공적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의 촛불은 과거의 함성과 다르다. 여기에는 개개인의 순전한 자기 분노가 있다. 맥락이 다르다.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고 예견할 일이 아니다. 이 촛불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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