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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협상 요구해도 무역보복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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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협상 요구해도 무역보복 못한다

[칼럼] 이명박정부 "재협상 불가론"의 허구

대다수 국민들이 목터져라 외치는데도, 여러 근거와 이유가 충분한데도, 이명박 정부가 "합의 무효화"를 거부하고, "재협상 불가"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나 일부 신문들이 주로 얘기하는 게 "통상마찰 우려"다. 일부 국민들은 고개를 끄떡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따져보자. 세계화시대, 총성 없는 무역전장에서 아무런 마찰 없이 '착하게' 살겠다는 것인가? 마찰이 두려워 고분고분 상대방 요구대로 다 내주며 어떻게 국익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국가간의 냉혹한 무역전쟁으로 크고 작은 통상마찰이 숱하게 빚어지는 게 현실이다. 때문에, 이를 규율하고 제도적으로 처리하는 분쟁해결절차와 국제기구가 만들어져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산하에 통상분쟁해결기구(DSB)가 설치된 후 올해 5월말까지 접수-처리된 국가간 무역분쟁은 총 374건에 달한다. 이중 절반인 188건은 미국이 관련된 분쟁이었다(제소 89건, 피소 99건).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인 한국으로선 미국과의 얼마간의 통상마찰은 사실상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같은 기간 한국이 관련된 무역분쟁은 총 26건(제소 13건, 피소 13건)이었는데, 그중 절반인 13건의 상대가 미국이었다. 그동안 1년에 한번꼴로 미국과 통상마찰을 겪으며 교역을 해왔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인데도, 국민더러 통상마찰이 우려되니 매 끼니 불안한 마음으로 식탁에 앉으라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다는 것보다 더한 망발이다.

무효화에 따른 일방적 무역보복은 WTO 협정 위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국민들을 위협하는 것이 "무역보복론"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6일 불교종단협의회 대표단과의 회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통상국가인데 지금 재협상을 요구하면 통상마찰 등으로 엄청난 문제가 생긴다. 자동차, 반도체 등 우리 상품의 수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후유증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를 모면하기 위해 재협상하겠다고 무책임하게 얘기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일부 신문들 역시 이런 논지로 "재협상 불가"를 복창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공갈이요, 엄포다. 허위사실로 국민들을 협박하는 행위다. 아마도 국민들로 하여금 과거 미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수퍼301조'의 망령을 되새기게끔 하려는 것같은데, '종이호랑이'가 된 지 오래다. 1995년 WTO 체제 출범 이후 일방적 무역보복조치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분쟁에 관한 세계무역기구의 협정서(DSU) 제23조는 "일방적이고 정당화되지 않은 보복조치"를 금지하고 있다. 자국의 교역상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됐다고 볼 경우 WTO의 공식 분쟁해결절차를 통해서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이 성장호르몬 주입을 이유로 미국 쇠고기 수입을 금지한 데 대해 미국은 보복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WTO에 제소하는 데 그쳤다. 한미간 쇠고기 합의 역시 별도의 분쟁처리절차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WTO 분쟁해결절차를 따라야 한다.

일부 몰지각한 신문들은 과거 중국과의 마늘분쟁 사례를 들먹이며 유사한 무역보복이 있을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이 역시 공갈이다. 2000~2001년 마늘분쟁 때 중국이 한국산 핸드폰 등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한 것은 당시 중국이 WTO 회원국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 역시 2002년부터 회원국이 됨으로써 그런 식의 무역보복은 불가능해졌다.

한국 정부가 이번 협상을 무효화시키고 기존 수입제한조치를 유지할 경우, 미국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 재협상을 요청하든지 아니면 WTO에 제소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에 맞게 대처하면 그만이다. 농림부는 이미 참여정부 시절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제한조치에 대한 논거와 자료를 상당히 축적한 상태다. 거기에 국내외 전문가들의 연구조사자료를 보완하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부시정권의 총애를 받아온 일본조차도 우리보다 더 엄격한 수입위생조건을 유지하고 있다.

떨어지는 것은 국가신인도 아닌 대통령-당국자의 체면일 뿐

한편, 정부나 일부 신문들은 재협상 요구시 국가 신인도가 떨어질 것이라 겁박하기도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국가신인도는 세계 최하위, 저 밑바닥에 있어야 한다. 이미 이뤄진 합의를 지키지 않거나 번번이 재협상을 요구하기로 악명높은 게 미국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미FTA 때도 그랬고, 페루, 콜롬비아와의 FTA협상에서도 그 나라 의회가 이미 비준한 후에 재협상을 요구해 재차 비준하도록 만든 게 미국이다.

사실 이번 쇠고기 합의 자체도 재협상의 산물이다. 미국이 광우병위험통제국가로 인정받은 뒤인 지난해10월 미국의 요구로 협상을 벌였으나 한국측이 전면수입개방을 거부해 끝난 사안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명박정부에게 재협상을 요구해 다시 협상을 벌인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배경과 영향>(2008.5.14)이란 공식 문서에서 정부 스스로 이번 협상이 '재협상'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국익에 큰 손실이 가해지는데도 미국의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주었다가 꼼수와 편법으로 수습해보려는 정부의 태도가 오히려 국가경쟁력, 대외신인도를 추락시킨다. 정부가 잘못된 협상을 하고, 국민들이 이에 항거해 바로잡으려 할 때 세계인들은 어떻게 볼까. "그 나라 국민들 참 대단하구나, 함부로 대할 나라가 아니구나" 할 것이다.

당당하게 무효화-재협상을 요구할 때 떨어지는 것은 국가 신인도가 아니다. 단지 대통령 및 일부 정부 당국자들의 체면과 위신이 손상될 뿐이다. 그야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대통령이 지난 4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대통령의 환대 속에 '카트 라이드'를 즐겼지만, 그건 공짜가 아니었다. 값비싼 대가를 후불로 치러야 하게 된 것이다.

당당하게 무효선언 못하고 꼼수에 의지하는 이유는?

이와 같이 허약한 논거에 의지해서라도 이명박 정부가 '합의 무효화'를 극구 거부하며 '재협상 불가'를 고집하는 것은 왜일까. 결국 재협상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란 결론 외에 뭐가 남을까. 당사자가 할 의지가 없으면, 아무리 근거와 이유가 넘쳐나도 안되는 것이다.

왜 안 하려는 것일까. 기존 합의를 무효화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려면 이번 협상을 잘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데, 결국 그게 싫은 것 아닐까. 이번 협상 이후 이명박대통령과 관계 장관은 국민 앞에서 수차례 머리 조아리며 사과했지만, 단 한번도 이번 협상이 잘못됐다고 인정한 바 없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공적인 책임까지 따르게 돼 있다. 대통령과 정부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이 요구하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정공법을 택하지 못하고, 민간 업자들의 '자율규제'같은 꼼수와 편법, 미봉책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국의 정부가 딴 나라 정부나 축산업자들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킬 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알량한 꼼수와 옹졸한 자세로 나라 망신시키고 국민들의 자존심만 상하게 할 뿐이다. 대통령과 일부 당국자들의 체면을 지키려고 계속 그런 식으로 대한민국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훼손한다면 상황은 정말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현재 상태에서 사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이명박 정부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바로잡는 사태가 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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