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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숲, 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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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숲, 그 바람"

김민웅의 세상읽기 <125>

가을바람이 숲을 흔들고 지나가면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숨을 쉽니다. 그건 마치 매우 부드러운 손길처럼, 생명이 피해가기 어려운 긴장을 여유롭게 어루만지는 동작을 닮아 있습니다. 덕분에 스스로 떨쳐 내기 어려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과 세상을 새삼 평화롭게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얻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도시가 요구하는 바쁜 노동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속도가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이 중지된 지점에서 도리어 우리는 그 일상을 새롭게 밀고나갈 기운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고 너무 욕심이 지나치거나 아니면 그저 우직하게 가고 있던 대로 가기만 하면 어느새 우리는 자신의 늙고 황폐해진 모습과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덧없는 시간의 축적임을 깨우치는 통렬함을 피하려면, 쉬었다 가는 이의 아름다운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알고 보니 속절없는 인생이었다는 식의 회한은 스스로 애를 쓰고 쌓아놓을 이유가 없겠지요.

숲은 또한 바람과 만나 자신의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동요하지 않는 침묵과 격렬한 순간, 그리고 단아한 정적과 활기 넘치는 소동은 모두 숲이 담고 있는 생명의 비밀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미처 눈여겨보지 못하거나 아니면 경청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인생을 빈곤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귀착되어갈 것입니다. 영혼이 가난한 자의 가슴에는 숲이 사라진 폐허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한편, 빛깔이 달라지는 계절에 부는 바람은 때로 관능적이기조차 합니다. 그것은 다만 체감온도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색채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신비입니다. 여기서 관능이란, 육체적 매력의 유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 햇살에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숨겨놓았던 감정의 속살을 은밀하게 보이는 정서까지 포함합니다.

눈가에 이미 준비된 아련한 눈물과, 입술에 요염하게 매복하고 있는 미소, 또는 강한 어깨와 나긋한 허리를 휘감고 있는 포옹의 욕망, 내지는 완강하게 대지를 버티고 서 있는 두 다리가 뿜어내는 거친 열정은 여느 때에는 그 정체를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는 자의 점잖은 표정을 미련 없이 해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부터의 갈망이 질식할 것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자유롭기 원하며, 누구나 '아름다울 수 있으면…' 할 것이고, 누구나 자신의 갈망이 어느 사이에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건 거칠 것 없는 바람의 자유이며, 숲의 노래이자 가을햇살의 서정입니다. 어느 이름 없는 역사(驛舍)에 아무런 계획 없이 내린 나그네처럼, 노을이 붉어져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을과 만나는 들길을 향수처럼 거니는 기쁨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른 가을의 색조가,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일상에서 탈출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런 출구가 있는 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우리의 인생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남루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우리의 영혼에 가을의 숲을 새롭게 일구어 보는 것입니다. 바람의 향기도 맡고, 낙엽이 쌓일 흙이 뿜어내는 싱그러움도 손에 만져보고 세상을 망각한 자인 양 터벅터벅 걸어보는 한가로움이 즐거운 그런 계절의 은총을 누려볼 일입니다. 그러다보면 청춘의 기력이 다시 솟아오르는 축복이 쏟아져 내릴지 누가 압니까?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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