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을 감싸는 햇볕은 투명하고, 산을 감돌아 흐르는 섬진강은 은어처럼 빛났다. 높이는 장대했지만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진 능선은 편안한 느낌으로 한 눈에 담겨온다. 초대 받아 간 곳은 낡고 오래된 민가이지만, 그 집이 들어선 자리는 그 어느 곳도 부럽지 않다. 서울을 떠나 그곳에 당도한 벗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들뜨기 시작했다.
미세한 바람의 떨림에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풍경소리 마음을 흔들고, 다정한 벗들과 툇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기분 또한 유별나다. 세월이 넉넉하게 지나간 한지를 바른 벽은 거기에 대고 불현듯 일필휘지(一筆揮之)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 그대로 병풍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제멋에 겨운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가인 집 주인의 선기(仙氣) 가득한 묵필(墨筆)과 묵화(墨畵)는, 도시에서 찾아온 좌중을 한껏 찬탄하게 만들었다. 화개장터가 있는 속세가 한 걸음이지만, 어느새 출가(出家)의 세상에서 신선이 된 듯 한 유유자적(悠悠自適)에 소리 없이 빠져든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또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언뜻 고개를 들고 이어지는 산 저 너머 하늘을 본다. 지난 밤 머리 위로 쏟아진 별들이 박혀 있던 자리, 흔적 없어 아쉬운 한편 거침없이 푸르다.
아침 일찍 산책을 다녀온 벗이 가져온 앵두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는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무얼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리게 한다. 그런 붉은 빛은 난생 처음 보았다. 누군가 주저치 않고 말한다. "땅 속에 물감 통이 숨겨져 있어서 그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색을 만든 이의 사랑도 그리 붉게 타오를 것이다. 그가 다녀온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보성과 더불어 우리 차(茶)의 산지, 하동(河洞)의 연두 빛 차밭이 펼쳐진다. 아무래도 물감 통이 있기는 있나보다. 곧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가 열릴 참이다.
하동 차 박물관 주인은 2대 째 그곳을 지키고 있는 착한 눈빛의 사나이였다. 두툼한 손을 가진 그는, 새로운 차를 만들었다며 녹차에 박하를 섞은 차를 끓여 내놓았다. 그 맛은 지리산의 기운을 소박하면서도 신선하게 풍기고 있었다. 차를 마신 마음이 이내 다소곳해지고 말투조차 차분해진다. 커피가 우리의 영혼을 이국의 정취로 황홀하게 만든다면, 차는 깊이를 더한다. 얼마 전 옛길도 열렸다 하니, 지리산은 더더욱 그 야생의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몸에는 지리산 향기, 그득 풍긴다. 그 향기마다 색깔이 있다. 벗들과의 우정과 오랜 만의 산행, 그리고 섬진강의 반짝거리는 비늘과 하동의 차 한 잔이 꿈결처럼 가슴에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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