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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재협상 포기'의 쓰라린 교훈을 잊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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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재협상 포기'의 쓰라린 교훈을 잊었는가

[칼럼] 쇠고기 재협상 요구 근거와 국제 기준

정부의 "재협상 불가론"은 이번 쇠고기 수입합의만큼이나 근거가 허약하다. 우선, 문제의 이번 합의 자체가 '재협상'의 산물이었다. 지난 4월의 한미간 쇠고기 협상이 미국의 요구에 따른 '재협상'이었음을 정부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아래 문건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지난해 5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미국에'광우병 위험 통제 가능 국가'지위를 부여, 특정위험물질(SRM)이 제거된 미국산 쇠고기는 먹어도 안전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미국은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을 위한 협상을 요구했고, 우리나라는 이를 받아들여 지난해 10월 1차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 협상을 가졌지만 서로 입장차만 확인한 채 결렬됐다. 이후 미국측은 외교경로 등을 통해 OIE 기준에 따라 광우병 위험부위(SRM)를 제외하고 모든 연령에서 생산된 모든 부위의 자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해 오다, 지난 4월10일 공식적인 기술협의를 요청해 옴에 따라 재협상을 벌이게 됐다.
<대한민국 정책포털,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배경과 영향, 2008. 5.14. www.korea.kr>

미국은 협상결과에 불만 있을 때 재협상을 요구해 끝내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시키곤 한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재협상 요구조차 못한다? 그게 한국 정부의 통상정책 요강인가?

재협상은 병가지상사, 특히 미국이 자주 요구

이미 타결한 협상을 다시 하자고 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 어렵거나 드문 일도 아니다. 협상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통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대화로 풀려고 하는 것이 협상이다. 한번 협상했는데 문제가 잘 안 풀리거나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다시 협상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끊임없이 협상하며 사는 게 세상 이치다.

사례를 찾자면 멀리 갈 것도 없다. 한미 FTA도 그랬다. 작년 4월 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다. 우여곡절 끝에 협정문까지 공개됐다. 그러나, 그후 미국 업계와 의회의 문제제기로 미 정부가 재협상을 요구했다. 주로 노동ㆍ환경 등의 분야에서였다. 한국 정부는 "재협상 불가" 입장을 천명하다가, 결국 6월 하순 재협상에 임했고 6월 30일 새로운 협정문에 서명했다. 정부는 "재협상이 아니라 '추가협상'일 뿐"이라고 강변했지만, 말장난에 불과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외국 언론에서도 '재협상'(Renegotiation)이라 보도했다. 일례로, AFP통신이 전세계에 배포한 6월 22일자 기사 제목은 "US hopes to complete FTA renegotiations by June 30(미국, 6월 30일까지 FTA 재협상 완료 희망)"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의 재협상 요구는 상습적이기조차 하다. 2006년 페루와 FTA를 추진할 때도 그랬다. 협상을 다 끝내고 페루 의회에서는 비준절차까지 마쳤다. 그런데 미국 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신통상정책이 추진되고 미국 정부는 페루에 재협상을 요구했다. 결국 양국은 다시 협상을 벌였고, 페루 의회는 지난해 6월 새로운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콜롬비아 역시 비슷한 식으로 재협상까지 해가며 미국과 FTA를 맺었다.

툭하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미국에게는 순순히 응해주고, 우리 국민들이 요구하는 재협상은 단연코 거부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통상정책의 요강인지 되묻고 싶다.

작년 협상 땐 거부했는데 이번엔 왜 거부 못했나?

정부가 "재협상 불가"를 외치는 거의 유일한 논거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가이드라인이다. "그것을 뒤엎을 과학적 발견이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국회 청문회 답변).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한 논박이 이뤄졌으므로 재론은 피하겠다. 단, 한 가지만 따지고 넘어가자.

미국이 광우병 위험통제국가로 지정된 후 작년 10월 한미 양국은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입장 차이로 결렬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OIE의 가이드라인은 변함 없는데, 그때는 그럼 어떻게 해서 미국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나? 국제기준을 뒤엎을 과학적 발견이 그때는 있었고 이번엔 사라졌나? 역시, 정부 문서가 답을 준다.

불과 6개월 전, 참여정부 하에서는 그랬는데, 이제 와서 달라진 게 뭔가? 위험평가가 달라졌나? 연구결과가 달라졌나? 대통령 그리고 국회 다수당이 바뀐 것 외에 달라진 게 무엇이 있었나?

정부와 미국이 그렇게 신주 모시듯 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E) 권고 외에도 국제기준과 과학적 근거자료는 많다.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각국의 검역주권을 존중하도록 하고 있으며, 각국이 자체적으로 수행한 위험평가(Risk Assessment) 자료를 토대로 광우병 관리 및 쇠고기 교역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미 쇠고기 주요 수입국 중 캐나다만 나이제한 해제

미국 쇠고기 주요 수입국들이 어떤 수입조건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지도 중요한 국제기준이 된다. 미국에 광우병이 발생해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미국 쇠고기 수입금지-제한조치를 취한 것은 2003년도의 일이다. 미 농무부 자료에 의하면, 그 직전 해인 2002년 수입실적을 기준으로 할 때 연간 1천만 파운드(약 450만kg)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 나라는 모두 8개국이었다. 일본 멕시코 한국 캐나다 홍콩 대만 중국 러시아 순으로 총 수입물량은 23.7억 파운드, 미국 전체 쇠고기 수출량의 97%에 달했다. 당시 한국의 수입량은 5억9730만 파운드(액수로는 약 8억달러선)로, 미국의 전체 쇠고기수출량의 24.4%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근 1백개 국가들의 수입량은 다 합쳐야 7540만 파운드로 전체의 3%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국제적 기준을 얘기할 때 어느 쪽에 초점 맞춰야 할까. 당연히 전체 물량의 97%를 점했던 8개 주요 수입국이어야 할 것이다. 그 8개 국가중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30개월령 제한을 해제한 나라는 캐나다뿐이다(한국은 아직 최종 확정 안 됐으니 일단 빼놓자). 캐나다는 광우병 발생국가인 데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쇠고기를 미국에 수출하기 때문에 소의 연령 제한을 해제했다. 캐나다 외에는 다른 어떤 주요 수입국가도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수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미국과 상당부분 경제통합을 이룬 멕시코조차도 30개월 미만 나이제한을 고수하고 있다.

대만과 일본은 한국처럼 미국으로부터 수입개방 압력을 받고 있지만 기존 제한조건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가 광우병 위험통제국가로 격상되자 대만과 쇠고기 협상을 가졌다. 그해 6월 27일 타결된 결과는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쇠고기"만 수입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도 미국측과 쇠고기 수입제한 문제에 대해 협의를 가졌다. 그러나 변함없이 "20개월 미만" 조건을 유지하기로 했다.

정부는 과학적 근거자료가 없어서 이번에 미국 쇠고기를 나이 제한 없이 개방했고,재협상도 못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 대만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어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다는 것인가? 정부는 유럽연합이 "제한조건 없이" 미국 쇠고기를 수입한다고 홍보하지만, 유럽연합은 OIE 및 미국보다 훨씬 엄격한 특정위험물질(SRMs) 규정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경우 그런 나라들보다 더 까다롭게 수입기준을 세울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 뼈 내장을 포함,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 섭취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다. 이러한 음식문화는 국제기구가 인정하는 국가별 위험평가의 중요한 고려요소가 된다. 한국 쇠고기시장에 대한 미국 농무부의 조사보고서조차도 한국의 음식문화 특성으로 한국인들이 음식의 안전성에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보고 있다(USDA, Impact of BSE Ban on U.S. Beef Sales in Korea).

이번 쇠고기 협상의 합의서는 "한국정부나 미국정부는 본 위생조건의 해석이나 적용에 관한 어떠한 문제(any matter)에 관하여 상대방과 협의를 요청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수입위생조건 25조). 이번에 제기된 문제는 이 위생조건의 적용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미국이 필요할 땐 언제라도 요구했던 게 재협상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못하겠다는 것을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긴, 협상 상대측과 이미 합의하고 멋지게 서명하고 자축행사까지 가졌는데, 그 덕분에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카트 라이드'까지 하며 환대 받았는데,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촛불 시위 좀 한다고 "협상 없던 걸로 하고, 다시 하자"는 말을 꺼내기는 좀 거시기할 것이다.

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재협상' 요구를 하지 못하겠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국회가 나서는 것이다. 미국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우리도 국회가 적극 나서서 재협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청문회로 끝날 게 아니라, 국회에서 이번 합의를 무효화하고 재협상하도록 결의를 하든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법률을 제정해 검역조건, 수입위생조건을 엄격히 만드는 것이다.

만일 국회마저도 안 나선다면, 그때는 정녕 국민들이 나서는 사태가 오게 될 것이다. 국사 교과서를 통해 우리 모두 익히 배운 교훈이 있다.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않으면 백성이 스스로 나서서,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어 이 나라를 지켜온 것이 우리 역사였다.

"재협상," 우리에겐 뼈저린 단어…

"재협상"이란 단어는 사실 이 땅에 사는 많은 이들에게 사무친 말이다. 1997년 11월, IMF사태가 터졌다. 긴급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IMF가 한국에 요구한 처방전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긴축재정, 고금리, 저성장 기조 등… 엄청난 충격과 부작용이 예상되는 데다 적절한 처방인지도 극히 의문이었다. 협상이라기보다는 IMF측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한 결과였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IMF와 재협상을 추진하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됐다. 당시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 <조선일보> 등이 대대적 공세를 퍼부었고, 이로 인해 재협상(추가협상)론은 쑥 들어가게 되었다.

그랬다가 재협상론이 다시 나온 것은 김대중 정부 출범 2주도 채 안 지나서였다. 1998년 3월 초, 전경련 대한상의 등 경제5단체는 고금리 문제 등을 지적하며 "새 경제팀이 IMF측과 거시지표 협상을 다시 벌일 것"을 촉구했다. 그해 7월 전경련은 "IMF와 재협상을 통해 금리를 인하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키로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사이에 전개된 사태는 많은 이들이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바 그대로다. 초금리로 인해 멀쩡하던 기업까지 줄줄이 쓰러졌고, 그로 인해 무너진 가정, 길거리를 배회해야 했던 직장인들, 그리고 스스로 내져야 했던 목숨들은 그 얼마였던가. 지금도 그 상흔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다.

불과 10년 전 일이다. 해야 할 '재협상'을 제대로 못하고 넘어가면 두고두고 회한과 상처를 남기게 되는 법이다. 특히 정부와 언론이 되새겨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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