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짝을 구하는 노력에서 겉보기의 주도권은 수컷 또는 남자에게 주어져있다.
그간 남자의 다양한 구애 전략이 개발되어 왔지만 기본은 먼저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陽(양)이란 'positive' 하니까.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든다고 표현을 하되 여기에 시점과 분위기, 어떤 전략을 택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
목적물이 있는 곳까지 가장 빨리 다가서는 방법은 그 목적물까지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다. 남자는 그래서 직선적인 접근법을 사용한다. 이것을 두고 '숫기'라고 표현한다.
숫기는 결국 勇氣(용기)이다. 용기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 아마도 남자가 일찍 죽는 것은 용기를 내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가가서 말했다가 거절 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선배 형님들은 다양한 금언을 남겼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용감한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밑져야 본전, 안 되면 말고,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먼저 들이미는 놈이 임자다, 맛있는 과일은 두면 썩는다, 선방이 제일이다, 등등 동서양의 다양한 어드바이스가 있다.
하지만 결국 실패를 통해 배우게 되니 山戰水戰(산전수전)의 노장이라 한다.
이제 여자의 접근법에 대해 얘기할 차례.
여자의 구애 전략은 간접적인 접근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치열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기다림에 능하다.
여자의 방법은 내밀하고 은근한 과정을 통해 마음에 드는 남자를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이 방법을 誘惑(유혹)이라 한다.
여자의 유혹은 비밀스럽고 은밀하며 고혹적이어서 심하면 치명적이다. 惱殺(뇌쇄)적인 유혹, 직역하면 사내의 뇌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이니 그야말로 'fatal seduction' 인 것이다. 언뜻 황진이가 떠오른다.
남자는 상대가 있는 장소로 바로 쳐들어가니 '대쉬(dash)'라 한다. 여자 역시 상대가 있는 곳으로 간다.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긴다. 근처에까지 가지만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근처를 서성대고 맴돌면서 남자의 대쉬를 유발한다. 반응이 잘 없으면 속을 졸이면서 좀 더 강한 암시를 주지만 끝내 직설적인 표현은 억누른다.
여자가 직설적인 표현을 참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전략으로서 여기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다.
권력이 결정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직설적인 구애 의사를 밝힌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장차 두 사람의 관계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일, 돈을 벌어먹고 사는 일, 애를 부양하는 일, 자존심의 문제 등등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누가 옆구리를 먼저 찔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여자는 상대의 의사를 받아들일지 여부만을 결정하는 것이지 먼저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된다.
남녀의 성적 권력은 남녀가 교합을 하는 순간까지는 여자에게 있고 그 이후부터는 남자에게 넘어가는 법이다.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섹스를 허락하기까지의 시간이야말로 여자가 남자로부터 최대한으로 권리들을 얻어내고 약속받아야 하는 절대절명의 기회라는 얘기이다.
나를 평생 존중하고 아껴줄 거지? 넵.
한눈 안 팔 거지? 넵.
가사 분담 할 거지? 넵.
끝까지 내 편이지? 넵.
믿어도 될까? 붉은 심장을 파내어 보여줄 수도 없고.
이런 서약의 과정은 여자는 콧소리로 묻고 남자는 눈에 힘주고 답하는 것이지만 대단히 결정적이고 숨 막히는 진검 승부의 순간이다.
고전소설 '이춘풍전'에서 춘풍은 평양기생 추월에게 그 과정에서 멀쩡한 잇빨 하나를 부지갱이로 뽑혀 사랑의 맹서로 바쳐야 했다.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조급한 순간이 언제인가?
사랑하는 여자의 옷을 처음 벗길 때가 아닐까. 시계를 풀고 스타킹을 벗고 원피스를 벗고 무에 그리 벗는 것도 많은지. 처음 이런 경험을 하는 남자에게 그 시간은 영겁과도 같다.
기분 같아서는 옷을 다 찢어버리고 싶지만 미친 놈 소릴 들을까봐서 겨우 겨우 참는다.
이처럼 여자는 구애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상전의 입장에서 은총을 내려야 한다. 두 사람이 최초의 섹스를 위해 옷을 벗을 때에도 최대한 늑장을 부리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남자의 성급함을 이용해서 그 순간순간 최대의 협상 성과를 얻어내어야 하고 또 다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결코 얕은 내숭이 아니다.
그래야만 아이들을 낳았을 때 남자는 부양의 책임을 다한다. 그래야만 대를 이어갈 수 있으니 필사의 노력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저 오빠를 믿었더니 배신당했다고 바보처럼 울지 말고. 여자의 생물학적 지능은 이 점에서 판가름 난다.
실로 묘한 것은 생리학적으로 섹스를 원하게 만드는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은 남자보다 여자가 적고 늦은 연령에 들어 분비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자에게 스킨십은 섹스의 전초 과정이지만, 여자에게 스킨십은 그냥 스킨십일 뿐이다. 섹스에 대한 충동이 서서히 발동되기에 남자의 구애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를 할 수 있게 만든다. 그 시간에 잘 따져보라는 유전자의 배려인 것이다.
남자의 직접적 접근과 직설적 표현 역시 이 陽性(양성)호르몬의 결과이다.
지금까지 짝짓기, 즉 有性生殖(유성생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이 유성생식이란 말 속에는 의미심장한 것이 들어있다.
짝이 없이 번식하는 생명의 방식, 즉 無性生殖(무성생식)이란 '아메바'처럼 세포분열을 통해 복제한다. 나뉨이 곧 번식이다.
그러나 짝이 있는 생식방식은 무성생식에 비해 두 가지의 커다란 절대명제를 준다.
하나는 사랑과 섹스라는 커다란 삶의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라는 개체의 종말이다. 무성생식에는 이 두 가지가 없고, 그저 분열할 뿐이다.
죽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체의 종말이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죽음이라는 종말점을 인지하는 생명체에게는 '나'라고 하는 自覺(자각)이 생긴다.
'나'란 관념은 죽어야 하기에 또 그 죽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짝짓기를 통해 '나'로부터 생겨난 생명은 자식이며 나와는 또 다른 개체, 나만을 닮은 것이 아니라 배우자도 닮게 되는 것이니 두 개체의 혼합복제방식이다. 그렇기에 더욱 '나'와는 다른 존재로 느껴진다.
자식은 '나'를 닮았지만 '나'는 아닌 존재, 가장 가까운 제 3자이다.
유성 생식하는 자는 사랑 또는 섹스라는 최고의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얻지만, 죽음이라는 아쉬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과 섹스가 주는 즐거움은 죽음이라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닐까?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다시 따라가 보자. 무성생식을 하는 생명체는 사랑도 없고 죽음도 없으니 '나'도 없다. 그저 분열할 뿐이다.
유성생식체는 짝을 짓기에 앞 세대는 죽고 다음 세대는 태어난다. 죽음은 종말이기에 종말을 맞는 존재인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나' 이전에 생각이 있고 생각 이전에 섹스가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줄이면 '섹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유성생식을 한다'고 확인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감각의 제국'이란 일본 영화에서 절정의 순간에 남자의 목을 졸라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변태가 아니다. 사랑은 죽음에 대한 등가물임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랑 또는 섹스는 모든 유성생식체의 생명활동 중에서 최고절정이기에 절대의 陽(양)이다. 죽음은 생명의 종지이기에 절대의 陰(음)이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서양 철학이다.
하지만 좀 더 높은 차원 또는 큰 눈으로 바라보면 '나'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대를 이어 번식하는 생명 그 자체는 불멸이다.
생명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과 죽음이라는 음과 양이 있을 뿐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내가 바로 조상이고 나이며 또 자식인 것이다.
조상을 모시고 기리는 것은 나에 대한 존중이며, 자식을 아끼는 마음 또한 나를 아끼는 마음이다.
나아가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역시 한 뿌리에서 나타난 생명이기에 분류하자면 한이 없이 다양하고 다른 것들이지만, 커다란 생명의 바다 안에서 둘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인 것이다.
그저 하나의 양과 하나의 음이 교차할 뿐 전체로서 하나인 것이다.
이 말을 동양의 고전에서는 一陰一陽之謂道,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번갈아 나타남을 일러 道(도)라 한다고 하며 또 낳고 또 낳는 것을 道(도)라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필자 역시 흥미로 끌어들이고 철학으로 마무리했지만 흥미와 철학이 둘이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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