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나'에 대해 얘기했으니 이번에는 '존재하고픈 나'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나의 존재가 否認(부인)당할 때이다. 조직이 실패하는 것은 구성원들이 그 조직과의 일체감을 상실할 때이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에 내가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 가면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게 한다. 정서적 유대감을 위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촛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촛불집회도 그래서 효과적이다.
사랑하다가 헤어진다고 하자. 진심으로 사랑했었다고 얘기하라. 당신을 사랑한 것은 내 실수이자 착각이었다고 말하면 저주를 받는다. 상대를 부인했기에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악덕은 예수를 부인했던 유다처럼 사정상 누군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별 이유 없이 상대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일을 예사로 저지른다. 사람이 無知(무지)하면 그렇다. 그래서 무지가 죄인 것이다.
함부로 타인을 부정하지 않고 일단은 받아들이는 자세를 관용이라 하고 더러는 '똘레랑스(tolerance)'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 그리고 이념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하면 조직의 결속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이 되기 쉬운데, 여기에 무지까지 곁들이면 최악이 된다.
어떤 주장이나 단체가 지나칠 때, '極(극)'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극좌 그리고 극우. 관용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음이다.
돌아와서, 아무튼 우리는 누구나 적게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은, 나아가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더 나아가서 모든 이로부터 빛나는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존재하고픈 나'라고 한다.
카사노바는 만나는 여인 한 사람마다 당신은 정말로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었다. 여기에 매혹적 바람둥이의 비결이 있다. 우리가 가장 듣고파 하는 말은 '역시 당신밖에 없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부인당하지 않기 위해 또 '당신이 최고야'라는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주변에 울타리를 친다. 남녀가 만나 가족을 이루는 것도 울타리, 자식을 많이 낳아 장성시키면 그 또한 내 울타리이다. 친구가 많은 것도 울타리이며, 학벌이 좋으면 그것으로 울타리, 나라가 부강하면 그 또한 내 울타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혈연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히고 뭉치는 것이다. 모두 내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다.
존재하고픈 내가 되기 위한 바람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권력에 대한 욕구라 하겠다.
우리가 어딜 가서 '나야, 나. 나 몰라!'하고 한 마디만 큰 소리쳐도 알아서 통한다면 얼마나 좋은가.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바일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런 큰 소리를 치며 사는가?
대통령이 그렇고 장관이 그러하며 국회의원이 그렇다. 재벌 회장도 그렇고 사회적 명망을 얻은 이들도 그렇다. 출세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간단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삶의 노골적인 진실이고 진리이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의 마음인 것이다. 잘 알아주지 않은 즉 불행할 것이다.
돈이 없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남들이 알아주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돈보다 명예라고 하는 것이다.
이 행복의 최소한은 집에서 알아주는 남편이고, 아내이며, 아무리 별 볼일 없어도 집에 가면 누구나 귀한 자식일 때이다. 이런 기본이 이루어지면 좀 더 자신의 주변을 확장하는 일에 사람들은 부단히 노력한다. 모두 출세하고픈 것이다.
공무원은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공무원이 있을까? 겨우 머슴 하려고 어려운 국가고시에 붙었던가 말이다. 또 머슴이라고 한다면 우두머리 머슴이 되어야지 그냥 머슴은 싫은 것이다. 정신 건강상 지극히 해로운 생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머슴들로 이루어진 조직 치고 서열과 권력이 철저하지 않은 곳은 없다. 기업에 다니고 공직에 있으면서 사는 맛이란 사실 봉사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보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래 머슴이 떠받들어주는 재미일 것이다. 그래서 뭐 떼어낸 내시도 할 만한 일이 된다.
최근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왜 영혼이 없겠는가? 다만 권력 체계 속에서 윗자리 상사 앞에서 주장을 펼치면 자리보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권력의 추구는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존재하고픈 나'를 확인받고자 하는 노력 중에서 가장 치열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이란 남에게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강제 또는 압박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 나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사람은 늙고 힘이 없어지면 서서히 존재감이 희박해진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권력에 대한 집착은 반비례해서 더욱 커진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도 정도껏이다. 끝까지 지니고 있다가 마지막에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자식들로부터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이든 사람의 욕망을 老欲(노욕)이라 해서 추하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세상은 힘이 있는 한 최대한 버티는 것이고, 도전하는 젊은이는 최대한 거세게 들이대는 것이다. 거기에 선악도 시비도 없다. 그저 자연이다.
다만 사회는 권력을 쥐려고 하는 자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그래서 모든 권력 후보들은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권력을 통해 누리겠다는 얘기는 뺀다. 행여 표 떨어질까 봐서.
결국 권력을 향한 욕망과 의지는 선악과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런 행복 추구권일 뿐이다. 한 때 섹스를 추하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섹스 역시 自然(자연)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반드시 종족보존의 차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권력추구의 일면이 있다. 내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친구가 부르면 싫어도 가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그런 능력을 사회성이라 한다.
출세한다는 것은 권력을 더 많이 지니게 된다는 말에 불과하다. 영향력이 있다는 말 역시 권력이 있다는 것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추구하라. 하지 말라고 해도 추구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말이 이왕이면 떳떳하게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죄는 아니니 말이다.
모두 존재하고픈 나를 확인받기 위함이다.
이제까지의 얘기를 정리해보자.
우리가 몸을 지닌 이상 그 몸을 부양하고 유지해야 한다. 또 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여러 욕구들도 충족시켜야 한다. 이를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몸이 지닌 기본적 욕구에 대해 그것은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이니 영원성이 없다. 그것에 집착하면 번뇌는 그치지 않을 것이니, 그 마음을 버리면 곧 고통에서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요체다.
권력이나 명예 또한 그런 것이라 한다.
이 말은 富貴(부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투쟁이 이를 둘러싼 투쟁이 아닌가 말이다.
결국 '욕망하는 나'와 '존재하고픈 나'는 우리가 태어난 삶을 얻은 이상 우리를 구성하는 자연스런 '나'의 일부인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우리는 싸우며 고뇌하며 번뇌한다. 싯다르타는 그것을 버리라고 했지만, 진실로 버린 자 얼마나 되리.
그러니 우리가 산다는 것은 번뇌이고 고통인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 행복하기 위한 번뇌이자 고통이다. 다시 말하면 번뇌와 고통은 행복의 다른 모습일 뿐 실은 하나인 것이다.
다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또 하나의 나가 있으며 그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를 필자는 '넘어서고픈 나'라고 표현한다.
이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근원적인 제약에서 온다.
잘 먹고 잘 살면서 존재의 확인까지 듬뿍 받으며 산다고 해도 영원히 그런 것도 그럴 수도 없다는 것.
잘 살아도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거, 결국 허무한 것이니 별거 없지 않나?'라고 죽음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것이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도 결국에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이 '넘어서고픈 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넘어서고픈 나'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긴다.
이 중요한 얘기는 다음 글에서 풀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의 긴 얘기들은 이 '넘어서고픈 나'를 말하기 위한 긴 서두에 불과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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