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하라 사다코
<히로시마>라 하면
아아! 히로시마라고/따뜻하게 대답해줄까
<히로시마>라 하면 <진주만>
<히로시마>라 하면 <난징학살>
<히로시마>라 하면 여자와 아이들을 참호에 가두고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인 마닐라의 화형
히로시마라 하면/피와 불꽃의 혼이 돌아온다.
<히로시마>라 하면
<아아 히로시마>라고 따뜻하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아시아의 죽은 자와 무고한 민중이
당한 자들의 분노가 일제히 터져 나온다.
<히로시마>라고 할 때
<아아 히로시마>라고 따뜻한 대답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더러운 손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1972년 5월)
이 작품은 피폭자이면서 피폭시인으로 불리는 구리하라 사다코(栗原貞子, 1913-2005)의 '히로시마라고 말할 때'이다. '피폭=피해라'는 등식 하에 피폭체험의 국민화를 통한 '피폭 내셔널리즘'이 등장하던 시기에, 구리하라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체험이 왜 세계, 특히 아시아의 보편적 반핵 평화사상의 역사적 기반이 될 수 없는가를 이 시를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문학 작품을 텍스트에 입각해서 풀어낸다면,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 체험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가를 줄곧 말해왔고, 따라서 이 비극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없애고 전쟁을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경험한 피폭자, 혹은 일본 국민은 평화와 반핵을 말할 자격이 있으며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피폭체험의 비극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미국 사람들은 진주만 습격을 말하고, 중국 사람들은 난징대학살을 말하며, 필리핀 사람들은 마닐라에서 벌어진 일본군에 의한 학살을 말한다. 따라서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말하기 위해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일본의 가해 책임을 말해야 한다, 대략 이런 논리일 것이다.
구리하라 자신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자신의 경험을 줄곧 문학을 통해 세상에 발신해왔다. 그녀가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72년 5월. 그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다른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1970년대 기독교계 여성단체 주최의 세계여성회의가 미국에서 열렸을 때의 일이다. 회의 종료 후, 친목회 자리에 나타난 미국인 남성을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던 미국의 영웅입니다"라고 소개를 했다. 이에 대해 어느 미국인 여성이 "그를 영웅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나는 미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분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들이 "미국의 원폭은 우리들을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습니다. 일본인은 자국의 군국주의를 반성해야 합니다. 히로시마의 비극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고 발언하였다."
원폭 그림으로 유명한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1901-1995)도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0년에 <원폭의 그림>(原爆の図)을 가지고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가령 중국인 화가가 일본이 저지른 난징대학살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일본에 갔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저지른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대량학살을 일본인 화가가 그려 그 그림을 미국에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전람회를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 우리들은 미국에서 난징대학살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기억의 비대칭성'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구리하라는 '히로시마를 말할 때'를 썼고, 마루키는 '난징대학살의 그림'을 그렸다. 가해와 피해를 성찰적으로 내면화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필자로서 알 길이 없다.
이 두 사람이 가해와 피해를 성찰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보편화를 꾀하였다고 해도, 남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시선에는 식민지 지배 문제나 조선인 피폭자 문제가 빠져 있다.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단죄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극동 군사재판(속칭 도쿄재판)을 통해 이루어졌다. 도쿄재판에서 단죄의 대상(즉 기소 대상)은 1931년 만주 침략부터 1945년까지이다. 두 사람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등치시키는 난징대학살, 진주만, 마닐라 학살은 모두 단죄 대상 기간에 일어난 일이며, 이는 도쿄 재판에서 단죄가 이루어진 행위이다. 따라서 여기서 피해에 등치되는 가해 사실은 모두 도쿄재판에서 국제법상으로 확인된 침략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도쿄재판에서 확인된 가해 행위를 확인하는 것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가해를 성찰적으로 내면화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의 한계는 그 이후에 나타나는 다른 시도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전개됐던 조선인/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일본 사회의 지원 운동은 그런 시도 중의 하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70년대 이후 일본의 시민사회에서는 적어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만을 말하지 않는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평화기념관의 전시 방식도 원폭 투하가 1945년 8월 6일, 그리고 8월 9일에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원폭 투하 이전에 일어났던 침략의 역사 위에 원폭 투하의 비극을 자리매김한다. 한국 사회는 어떨까?
히로시마의 희화화
2006년 4월 21일 <YTN>은 주한 외교사절 등을 상대로 '폭탄주 예찬론'을 설파하는 폭탄주 실연(4월 18일 개최)을 영상으로 보도했다. 이 화면에서 <YTN>은 "어떤 이에게 너무 섬뜩한 폭탄주"이라는 자막 제목과 함께 양주잔을 떨어뜨릴 때 "맥주 거품이 튀어 오르는 모양이 마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버섯구름과 비슷하니, 이를 원자폭탄 주라 한다"는 주최 측의 설명을 영상과 함께 곁들인다.
그리고 카메라는 오시마 쇼타로 주한 일본 대사의 불편한 표정을 잡는다. 자막에서 말한 '어떤 이'란 쇼타로 대사일 것이고, 이를 좀 더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일본, 혹은 일본인일 것이다. '너무 섬뜩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폭탄주의 거품 모양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비유하는 것이 오시마나 일본, 혹은 일본인에게 불편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예상'은 주최 측이나 <YTN> 측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4월 20일 <조선일보>에도 한국의 재미있고 독특한 술 문화의 하나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일반 미디어에는 소개되지 않은 듯하나, 블로그를 통해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 사회에도 전해졌고, '혐한론'을 증폭시키는 재료로 다수 사용되었다. <YTN>의 보도는 전후 상황으로 보아서 원자폭탄주에 대한 심사장의 설명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일본 대사의 표정을 비춘 것으로 보인다.
이 일화는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일과성의 가벼운 농담거리 중의 하나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것만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핵무기에 대한 무지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을 희화화하는 이런 사례는 일상생활 속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사실 '피폭의 희화화'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피폭경험을 끊임없이 외부화시키고, 배제시키고, 일본의 경험으로만 가두어두려는 현대 한국 사회의 복잡한 사정이 그 배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피폭 경험을 민족이나 국적에 의해 구분하는 것이 반드시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체 피폭자의 약 10%가 한국인/조선인이며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피폭 2세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폭탄주의 거품을 히로시마 원폭 버섯구름'으로 형용하는 것은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하기는 힘들다.
피폭자의 대다수가 일본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피폭자를 민족이나 국적별로 보면 근 20개국에 달한다.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조선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사람들도 다수 피폭 당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 보아도 피폭 경험을 일본인만의 경험만으로 가두어둘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조기종결론'이 '식민지조기해방론'으로
물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하늘의 축복"처럼 받아들이는 입장은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원폭투하를 일본 제국주의 지배 하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가져다준 최대의 원인이라고 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미국의 원폭투하와 한반도의 해방을 연속하는 인과관계로서 간주하여 원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짐으로써 한반도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 민중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말하는 '전쟁조기종결론'(원폭으로 전쟁이 조기에 종결됨으로써 많은 미군 병사의 인명을 구했다고 하는 미국의 공식입장)은 한국에서는 '식민지조기해방론'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리영희 씨는 말한다.
"두 발의 원폭 덕분에 해방된 한국 민족으로서는 원폭을 투하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인도했다고 하는 미국의 논리만이 정답이었다. 그 밖의 3자적 입장이나 관점, 특히 일본 국민의 일부를 대변하는 감정이나 논리는 고려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무시당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반핵이라는 평화이념을 보편적 가치로서 받아들일 때 반드시 역사인식으로서 히로시마와의 역사적 정합성을 묻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핵(무기)에 대한 반대를 규범적인 가치로서 상정하고 역사적 실체로서의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가치판단에 직면하게 되면 원폭투하와 한반도 해방과의 인과관계에 관한 기존의 설(說)에 어떤 형태로든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반도 해방이 원폭투하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기존의 학설에 수정을 가하지 않는 한, 현재의 절대적인 반핵론에 기초해 1945년의 시점을 해석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 연장론'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해'를 피해가는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핵에도 '좋고 나쁨'이 있어서,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핵은 이른바 '좋은 핵'이라고 하는 '전략평화론'이나 '무장평화론'을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이다.
한반도 해방의 계기를 원폭투하에서 구하고 핵에 '정의'라고 하는 성격을 부여하게 되면,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핵무장 평화론'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원폭투하와 한반도 해방과의 인과관계를 역사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원폭투하의 목적이 많은 미군이나 일본인의 인명을 구하려는 것에 있었다고 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견해는 최근에 많은 연구를 통해 부정되고 있다.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전후 냉전세계 최초의 외교전쟁에서 전략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원폭투하가 결행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블랙켓트(Patrick Maynard Stuart Blackett)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우리는 원폭투하 목적이 냉전 대비용이었다는 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
"최초의 원폭을 8월 6일에 서둘러서 투하한 결정을 내린 군사적·물리적 이유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전후 세계의 힘의 균형에 관련되는 가장 강력한 외교적 이유는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원폭투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군사 행동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와의 차가운 외교전쟁의 첫 번째 작전의 하나였다."
원폭투하와 전쟁 조기종결이 인과론으로 이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 조기 종결론'의 한국판인 '식민지 조기 해방론'도 동시에 성립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인/조선인 피폭자의 고통을 외부화시키고 배제해왔던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적 고민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동시에 '핵무장 평화론'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경험을 전유(專有) 독점함으로써 피폭 경험을 국민화시키려는 일본의 피폭 내셔널리즘에 대항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리영희, 「1945년, 히로시마의 영원의 전쟁」, Wilfred Burchett, 『히로시마의 그늘(Shadows of Hiroshima)』의 한국어판 추천문, 창작과 비평사, 1995년.
P.M.S.ブラケット著『恐怖・戦争・爆弾-原子力の軍事的、政治的意義』法政大学出版局, 1951년.
丸木位里・丸木俊『原爆の図』1988년.
権赫泰, 「集団の記憶、個人の記憶」『現代思想』2003년8월, 靑土社
『日本の原爆文学』ほぶる出版,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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