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의 "실현 가능한 정책과 대안"을 말할 때, 늘 빠짐없이 상징적 존재의 하나로 거론되고 인정되었던 인물. 2004년 총선을 마주한 민주노동당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서민들에게 복지를"이라는 구호를 내세울 수 있게 정책적 기초를 닦았던 인물. 그이가 바로 이재영이다.
이런 그이의 세상 떠남에 대해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는 "진보정치의 꽃이 졌다"고 했고, 장상환 경상대 교수(故 이재영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와 그이의 선배 이근원은 "진보정치의 왕별이 떨어졌다"고 했다. 김형석 등은 "진보정당운동의 심장이 멈췄다"고도 했다. 이재영 그이의 진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말이고, 진보정당의 정책을 담당하던 동료로서 그이와 가장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내가 보기에도 맞는 말이다.
1993년 스치듯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고, 1%의 성공 가능성밖에 보이지 않던 1997년의 '국민승리21'에 결합하면서부터 이재영 그이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이와 나는 너무나 많이 달랐다. 성격 등의 면에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었던 이재영과 비교할 때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했고 까칠하기까지 했다. "밥은 굶어도 술은 굶을 수 없다"며 술자리를 즐겼던 그이와는 달리, 나는 개인적으로 술 자체를 좋아하지 않고 술자리는 가급적 피하는 스타일이었다.
사상이나 가치지향도 달랐다. 이재영 그이는 유럽좌파 사민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가치 지향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반면에, 나는 모두에게 생소하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또 북한을 포함한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주의(국가주의 사회) 또는 이를 연상시키는 모든 유형의 '모호한 사회주의' 자체를 반대했다.
심지어 정책을 다루는 방식이나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입장이 달랐다. 예컨대 부유세 문제에 접근할 때 그이는 조세 투명성 등을 기초로 접근하는 윤종훈 회계사식 접근도 옹호했다. 반면에, 나는 늘 조세의 수직적 형평성 등의 관점에서 접근했고 그이의 생각에 반대했다.
이렇듯 따지면 따질수록 그이와 나는 달랐다. 그만큼 많이 티격태격하면서, 나는 경제정책(부분적으로는 노동정책)을 총괄하는 담당자로, 그이는 나머지 모든 정책을 총괄하는 담당자로 1997년 이후 10년을 같이했다.
그이와 나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은, 주어진 현실에 발 딛고 서서 최선의 정책적 대안을 찾고, 이를 사회화시킴으로써 그이가 방점을 찍었던 "진보정치"와 내가 방점을 찍었던 "노동의 정치"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정책에 대한 혜안을 가지고 있던 사람답게, 이재영 그이는 자본론 연구를 통해 내가 얻게 된 독특한 정책능력을 한눈에 알아봐 줬다. 또 그는 내가 그이를 신뢰했던 것 이상으로 단 한 번도 나에 대한 신뢰의 끈을 버린 적이 없다.
이재영 그이는 늘 내 정책적 활동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고, 그이와 다르거나 반대되는 내 주장까지도 존중해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이재영은 나에 대한 그이의 글에서 나와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활동에 대해 "단지 '개량주의'였던 정책위원회만"이 "소극적으로 엄호해주었을 뿐"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실은 "이재영만이 적극적으로 엄호해주었을 뿐"이라고 했어야 옳다!).
1997년 국민승리21의 선대본 시절, 경제정책 우선순위 등을 놓고 정책교수 자문단의 일부 교수들과 내가 정면충돌했을 때에도 그랬다. 이재영 그이는 "진보정당의 정책을 위해서는 교수 100명보다 송 박사 한 명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한마디 말로 교수들의 양해를 얻어내기도 했다(이런 말로 교수들의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이재영 말고는 없을 것이다!).
또는 내가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의 위험성도 모르는 사람들은 퇴보세력이지 어떻게 진보냐" 등의 독설을 퍼부으며 아주 까칠하게 소란을 피웠을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쟤는 짤라야 하지 않을까"던 천영세 전 의원(당시 선대본부장)의 말에 "틀린 얘기는 아무것도 없는데요"라며 나를 옹호했다.
1998년 청산위기에 직면했던 국민승리21의 기적 같은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실업대책운동(한국 최초의 대안적 정치운동)의 배후에서 내가 거칠게 정리했던 노동·실업정책을 처음부터 신뢰하고 옹호해줬던 이도 이재영이었다.
▲ 1998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의 전신) 삼선교 시절의 동료들 - 뒷줄 맨 왼쪽의 필자, 앞줄 맨 왼쪽의 초록색 점퍼가 이재영; 앞줄 왼쪽부터: 이재영 김창현 황정아, 뒷줄 왼쪽부터: 송태경, 이상현, 최철호, 김해근, 박용진, 오현아, 김두수, 이근원. ⓒ송태경 사무처장 제공 |
민주노동당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경제민주화 운동본부의 탄생배경에도 이재영의 나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당시 권영길 대표의 지시 반 부탁 반으로 고심 끝에 작성한 경제민주화 운동본부 정책기획안은, 창당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터무니없이 부족한 인력과 자금 문제로 유보된 채, 내 책상 위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내 고민을 얘기했을 때, 이재영 그이는 "나도 노(노회찬 의원, 당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기획안을 유보했었다)와 생각이 같다, 지금 꼭 이걸 만들어야 해요?"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이재영 그이는 "송 박사가 그렇다면 (자신은 안 그렇다 생각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며 반칙을 쓰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줬다.
나는 이재영 그이가 알려준 방법대로, 노회찬 당시 정책기획위원장이 없는 틈을 타서 기획안을 정책위원회 보고 안건의 하나로 상집회의에 올렸다. (아직도 이 반칙에 대해서는 노회찬 의원에게 미안한 맘이 크게 남아있다!) 그리고 권영길 대표는 그것을 전국대표자회의 안건으로 올려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 성장사에서 한 획을 긋는 경제민주화 운동본부는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재영 그이의 신뢰가 없었더라면, 재벌 및 전두환 재산환수 운동부터 상가임대차운동을 넘어 신용회복운동 및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운동까지 이어졌던 민주노동당 주도의 경제민주화운동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재영이 내게 보여줬던 신뢰는 그이가 가진 독특하고 출중한 정책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의 발현이었다.
내가 정책을 다루는 방식이 주로 현실의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의 정책대안을 생산‧가공하고 이를 대안적 정치운동을 통해 사회화시킴으로써 노동자 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신뢰 및 참여를 끌어내는 방향이었다면, 이재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주로 이에 필요한 정책 인재를 찾고 이들이 하모니를 이뤄 시너지 효과를 얻기를 원했다. 예컨대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의 박창규와 부유세의 김정진을 정책위원회로 영입한 것은 이재영 그이가 가진 독특하고 출중한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을 드러내는 사례 일부다.
2002년 부유세의 김정진을 영입할 때의 일이다. 흥이 나면 으레 보여주는 약간 과장된 몸집으로 이재영이 내게 말했다. "송 박사, 변호사 하나가 있는데, 조세재정문제와 부유세를 연구했데요, 이건 대단한 거야." 그이에게 내가 물었다. "그래 그런 분이라면 모셔오면 좋은데, 가능할까? 정책위 티오 없는 건 재영이 국장이 잘 해결하겠지만, 상근활동비 60만 원으로 그런 분 모셔오는 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재영 그이가 웃으며 반문했다. "송 박사, 나랑 내기하자. 내가 데려오면 술 한 잔 사는 거지? 내가 장담하건대 아주 고맙다고 하면서 올걸."
정말 신기하게도, 김정진 변호사는 그렇게 그것도 이재영 그이의 장담처럼 "스스로 고마워하며" 정책위에 합류했고, 덕분에 2002년 대선후보 권영길은 내가 정리한 2개의 성장론 중의 하나인 "분배를 통한 성장"과 함께 "김정진의 부유세"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덧붙이면, 이재영 그이와 이와 같은 종류의 내기에서 나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이겨본 일이 없다. 번번이 나는 내기에서 졌고, 다만 술 한 잔을 사는 대신에, 드물게 그가 있는 술자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그 벌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으레 이재영은 "송 박사와 술자리를 같이하는 건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고는 했다.
내가 이재영 그이와의 내기에서 단 한 번 이긴 것은 "정책 때문에 이렇게 둘 다 과로하며 살고 있는데 둘 중 누가 더 오래 살까"하는 것이었는데, 그이와 나 모두 매우 밝고 명랑하게 사는 이재영이 더 오래 사는 데 걸었고, 결국 나는 그이의 장례식장에서 좀체 마시지 않던 소주를 삼켜야 했다.
어쨌든 내 오랜 벗 이재영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자본론 박사"라 불리며 자본론의 통찰에 기댔던 나 이상으로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 면에서 누구보다 출중했던 바로 그이가 세상을 뜬 것이다.
세상을 떠난 지금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이미 "진보정치의 꽃"으로 "진보정치의 왕별"로, "진보정당운동의 심장"으로, 특히 "진보정당 최고의 정책두뇌"로 마땅히 평가받았어야 할 그이가 살아생전에는 결코 그리 평가받고 대우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살아생전 진행된 일은 거꾸로다. 진보정당의 정책적 기초를 다졌고,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 면에서 누구보다 출중했던 그이에게 진보정당 운동이 되돌려주었던 첫 번째 큰 선물은 "사실상의 해고조치"였다.
2006년 자주파, 그중에서도 경기동부의 이용대 씨가 정책위 의장이 되면서 그이는 정책위뿐만 아니라 중앙당 상근까지 포기해야 했다. 정파적 이해관계가 그이의 경험과 노하우 및 출중한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보다 우선했다.
진보정당 운동이 그에게 돌려준 두 번째 큰 선물은 대장암이었다. 과로와 불규칙한 식사 등으로 위장이 모두 다 망가졌지만 치료받는 것으로 충분했던 나와는 달리, 그이에게는 대장암이 따라붙었고 더욱 불행하게도 생존확률 15%밖에 안 된다는 대장암 말기가 돼서야 그 병을 발견했다.
물론 내 오랜 벗 이재영 그이는 진보정당 운동이 그에게 준 두 가지 불행한 선물 모두에 대해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었다. 그이는 세상을 뜨는 그 순간까지도 진보정치의 건강한 성장을 바랐으며, 내게도 농담하듯 "송 박사, 내 생존확률이 25%래요, 살면서 이렇게 큰 확률을 잡아본 적 없어, 이건 로또야 로또"라며 삶을 희망했다. "25%는 무슨 15%라던데"라는 내 반문에도 "그거면 어딘데"라며 웃음 짓던 그였다.
"자본의 정치에 대항하여 주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 토대에서 더 나은, 더욱 바람직한 상태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한 정치", 즉 진보정치에 대해 이재영 그이는 자본론의 통찰에 기댄 나처럼 개념정의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더 '진보정치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실천적으로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열망했다.
진보정당들이 현재 처한 현실과 관련해서도, 이재영 그이는 누구보다도 출중했던 진보정치의 정책두뇌답게 중국의 전략가 장량의 '장량소잔(張良燒棧)의 방책'을 끌어들여 "잔도를 불사르고 파촉(巴蜀)에 깃드는 것만이 장래의 출사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듯 (진보신당이라는) "작은 영지(領地)나마 소중히 가꾸어 나가는 것이 현 단계 진보정당운동의 과제"라며 그이에게는 마치 하나의 "과학"과도 같았던 그이의 두 선배 주대환·노회찬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게 부탁이란 걸 해본 적이 없던 이재영 그이는 "자신이 몸으로 피부로 체득한 진보정치"를 위해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간곡하게 하기도 했다. 2008년 분당 이후 진보정당 운동과 거리를 둔 채 그저 강태공의 심정으로 때를 기다리며 민생연대로 나와 있던 내게 진보신당 상근을 부탁한 것이다.
"마땅히 진보정치·노동의 정치라면, 주어진 현실에 발 딛고 서서 더 나은 더 바람직한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함으로써 노동자 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신뢰 및 참여를 끌어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나와 과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구성원들(이선근, 임동현 등)이 공유했던 정치철학과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보신당을 위해 절실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난해 여러 상황 변화에도, 통합논의가 이상하게 흘러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재정립되면서 딜레마에 처해 있던 내게 이재영이 던진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 그렇지만 나는 그이의 부탁에 대해 선뜻 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선뜻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재영 그이가 내게 특별한 존재이고 그런 존재의 최초의 부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재영과 달리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어떤 확신이 서지 않는 한 행동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해보겠다"고만 답했다. 그리고 한 달 후쯤 이재영의 부탁에 이어 존경하는 장상환 교수까지 찾아와 "처음부터 다시 하자" "진보신당을 위해 고생 좀 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결국 수락했다.
아픈 그이에게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이재영 그이는 어린애마냥 참으로 기뻐했다. "3만 원도 괜찮은 때가 있었는데, 진보신당은 그래도 150만 원에서 많으면 200만 원까지는 챙겨 줄 거야, 대신 내가 빨리 퇴원해서 맛있는 거 사줄게"라며 경제적 문제에 대한 위로도 잊지 않았다.
장상환 교수의 부탁과 대표였던 홍세화 선생의 강력한 뜻에도, 진보신당 상근이 좌초되며 큰 충격에 빠졌을 때도, 이재영 그이는 내게 웃으며 "조만간 퇴원해서 말끔히 정리"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랬었다. 진보정치가 무엇이고 자신이 진보정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몸으로 피부로 알고 체득하고 있었던 이재영 그이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진보정치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고, 또 자신의 삶에 대해 절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이재영 그이는 없다. 뒤늦게나마 그이의 진가를 인정하고 평가하고 이재영 그이가 가졌던 진보정치의 넋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늘어나도, 누구보다도 출중했던 그이의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을 이어갈 사람은 없다. 진보정치를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장량소잔의 방책"을 준비하고 실행해 옮기고 성사시킬만한 사람은 이제 없는 것이다. 제갈공명조차 준비하고 실행에는 옮겼으나 성사시키지는 못했던 그 방책을 진보정당 영역에서 천하의 이재영 말고 또 누가 있어 준비하고 실행하고 성사시킬 수 있을까? 그런 인재가 정말로 한국 사회에서 다시 나올 수 있기는 할까?
특히 이재영 그이가 "파촉"(巴蜀)으로 생각했던 진보신당마저 가치지향 및 이행의 사회적 전망에서 사실상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주의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 그의 방책은 더더욱 실현되기 어려운 형국이다. 이것이 내 오랜 벗 이재영을 잃은 또 다른 안타까움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한국 진보정당 운동이 낳은 최고의 정책두뇌 이재영 그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장량소잔의 방책"을 누군가 새롭게 준비하고 실행시키지 않는 한, 이재영 그이의 꿈이자 나의 꿈이기도 했고 진보정당 운동영역 모두의 꿈이기도 한 진보정치의 건강한 성장과 이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최고의 상태는 최선의 상태에서뿐만 아니라 종종 최악의 상태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또한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이재영 그이와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슬프다. 지금 내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온통 슬픔뿐이다.
p.s 한국 사회의 정치적 구도는 이미 "진보와 보수의 대립구도" 및 "민생 VS 반(反)민생의 대립구도"로 완연하게 재편되었으나, 정작 그 중심축에 있어야 할 진보정당 운동은 존재감을 상실했다. 내 오랜 벗 이재영이 마지막 남긴 "장량소잔의 방책"을 누군가 새롭게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만이 지금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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