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실용정부임을 강조하고 있다. 실용이라 함은 원칙과 명분에 매달려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대신 현실에 맞는 유연한 접근을 통해 최대한 실리를 확보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좋은 말이다. 좌우의 이념논쟁과 과도한 가치우선은 이제 21세기 한국 현실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용정부라 자처하는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대북정책이 전혀 실용적이지 않음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최근의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보고 있노라면 말로는 실용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명분과 원칙에만 집착하는 형국이다.
한미관계는 한미동맹 복원이라는 최우선의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할 형편이다. 지난 시기 한미동맹이 균열되었다는 인식하에 새 정부는 한미동맹을 철저히 복원하겠다는 강력한 명분을 내세웠고 이는 곧 동맹복원을 위해 한국 정부가 꼼짝없이 미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가장 비실용적인 결과로 연결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관계는 '할 말을 하는, 협상이 있는' 양자관계였다. 따라서 이것이 잘못된 한미관계였다고 스스로 실토한 이상, 이명박 정부는 미국에 대해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협상 대신 합의만 존재하는' 일방향적 한미관계를 감수해야만 한다.
한미동맹 강화라는 명분
강력한 한미동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계획된 한미정상회담을 놓고도 한국과 미국의 기대와 접근이 사뭇 다른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는 모처럼 북핵문제와 대북정책에 대해 단호하고 원칙적인 한미공조의 목소리를 도출하고 싶었지만 정작 북핵문제는 싱가포르 북미회담에 의해 협상의 모멘텀이 유지되면서 한국 정부의 단호한 입장이 머쓱해지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대북압박을 통해 북한 스스로 굴복할 때까지 의연하게 대처한다는 생각이고 또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국은 북핵을 이유로 남북관계마저 경색국면을 감내하고 있는데 정작 미국은 북한과 핵협상을 진전시키면서 테러지원국 해제를 고민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 가진 한미정상회담에서 과연 어떤 내용의 대북입장이 조율되어 나올지 궁금하기만 하다.
대북 한미공조의 단일한 목소리 대신 미국은 한국에게 평소 쉽게 꺼내지 못했던 다양한 요구사항을 의제로 올려놓는 모습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깐깐하게 서로의 입장을 교환하며 실리를 계산했던 의제들을 이번에 미국은 한꺼번에 쏟아 놓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잘못된 한미관계를 제대로 잡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인만큼 이 기회에 자신의 요구사항을 내놓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가장 확실한 협상 전략일 것이다.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해왔던 2사단 이전 비용과 주한미군 분담금 문제도 이번엔 미국이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건강과도 직결된 소고기 수입 전면 개방 문제도 은근슬쩍 거론하고 싶어 한다. 어렵게 파병했다가 겨우 철수한 아프간 재파병 문제도 미국은 한미동맹의 징표처럼 요구하고 있다.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에서 쉽사리 결정하기 힘든 미사일 방어체제도 미국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긍정적 답변을 원하는 모양이다.
균열되었다는 한미동맹을 복원시키기 위해 첫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적잖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통령 누구도 가보지 못한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하룻밤 숙박료는 그리 만만한 가격이 아닐 것이다. 한미동맹 복원이라는 스스로의 명분에 걸려 미국의 의도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동맹이라는 명분의 덫에 이명박 실용정부가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북핵폐기 우선 명분
한미관계가 동맹복원이라는 추상적 명분에 매달려 실리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남북관계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원칙과 명분을 앞세워 현실에서의 실리를 포기하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남북관계가 잘못된 비정상 관계였다는 인식하에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의 지속성을 하루아침에 무력화시켰다. 북핵 우선, 상호주의, 인권개선 등 야당 시절 익숙했던 원칙과 주장이 지금 집권 정부가 되어서도 그대로 대북정책의 명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명분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시작도 못하고 경색되어 있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와 북미관계 진전 가능성 등을 감안할 때 한국은 남북관계라는 끈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일정한 역할과 발언권을 확보해야 한다. 남북관계라는 대북 지렛대를 놓은 상태에서 한국 정부의 한반도 정세 개입력은 당연히 구호에만 그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야당시절 강경한 슬로건만 내세운 채, 비현실적인 명분에 집착한 채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북핵 우선의 원칙은 당연히 북핵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유지조차 힘든 논리적 구조이다. 북핵 해결 없이 개성공단 확대가 어렵다는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문제 발언 역시 이명박 대통령의 북핵 우선 원칙에 너무도 충실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유지하고 진전시킴으로써 위기를 관리하고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은 북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을 가능케 한다. 북핵을 이유로 남북관계를 닫았을 때 오히려 우리가 북핵문제의 국외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의 경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반대로, 북핵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병행했을 때 실제로 우리가 북핵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음은 노무현 정부의 경험에서 오히려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동맹을 훼손시켰다는 정치공세를 받아가면서까지 부시 행정부의 선핵포기 주장에 반대했고 급기야 미국은 대북입장을 바꿔 주고받기식 양자협상에 나섰다. 이미 부시 행정부가 시행착오를 거친 북핵 우선 원칙을 이제와 한국 정부가 또 답습하고 있으니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호주의 원칙도 북한이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남북관계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가 쌀·비료를 주면 북도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등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상호주의 원칙의 최고봉이다. 그러나 그동안 쌀·비료 지원은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사실상의 상호적 조치로 간주되고 있었다. 즉 우리가 인도적 대북지원을 하는 대가로 북도 이산가족 상봉에 응하는 사실상의 상호주의 연계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상호주의라는 추상적인 원칙에 매달려 북한이 수용하기 힘든 상응조치를 전제로 내걸 경우 당연히 남북관계는 시작도 하지 못하게 된다.
사실 남북은 국력과 경제력 및 체제 성격 등의 차이로 인해 상호 유사한 선호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반론적으로 기계적인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 즉, 남한의 요구가 북한이 받을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식'될 경우 북한 입장에서는 상호주의가 아니라 일방주의로 간주될 수 있다. 쌀·비료 지원의 대가로 요구하는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는 바로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인권개선 원칙 역시 북한 인권의 실질적 개선이 가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한 지금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유지하기 힘든 소모적 명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지만 인권문제는 이미 정치적 무기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물며 오랫동안 대치하고 적대했던 남북관계에서 인권개선을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공세로서의 성격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북한인권의 개선을 주장하는 것과 실질적인 인권개선이 이뤄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임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당당함과 가치우선의 도덕외교를 위해 북한인권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곧바로 북한 주민의 인권개선을 가져오지 않음을 알고 있다면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인권개선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만족적인 무조건적 대북 인권공세가 아니라 식량지원부터 시작해 북한 주민의 생명권을 개선하고 점진적으로 북한의 경제회생과 경제발전을 유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내부 시민사회 형성에 의한 인권상황의 개선을 이끄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해법이 될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구호성 인권개선 요구만 내세운다면 실질적인 인권개선은커녕 남북관계 경색만 결과하게 된다. 그야말로 명분에 매달려 실리마저 잃는 셈이 되는 것이다.
9.19공동성명부터 읽어보라
결국 이명박 정부는 야당 시절 내내 반복했던 이념성 구호와 원칙에 빠져 그동안 애써 이어왔던 남북관계의 실리를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핵문제 해법에서 북핵 폐기 우선만 강조하는 것은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6개국이 모두 합의했던 2005년 9.19공동성명에도 위배된다. 핵폐기가 선결조건이 아니라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과 북미 북일관계 개선,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에 이르기까지 북핵 해결은 포괄적 패키지의 동시접근임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상호주의와 인도주의를 내세워 북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은 이명박 정부의 외로운 구호에만 머물 공산이 크다. 아무런 지렛대도, 개입력도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태도변화만을 우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의미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 또한 그로 인한 북한의 최근 강경대응에 대해서도 여전히 무대책으로 북한의 태도변화만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의연하게 대처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북한의 행동에 대해 달리 방법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버티면 북이 결국 굴복할 것이라는 낙관이 정부 내에 있다지만 이 역시 주관적 기대를 앞세운 성급한 판단이다. 남북관계 중단으로 북이 입는 손해 때문에 남쪽의 요구에 북한이 굴복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꼬여버린 남북관계를 그나마 개선할 수 있는 길이 최근 열리고 있다. 싱가포르 북미 회담을 계기로 핵신고 문제가 합의되면서 북핵문제의 일정한 진전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북핵과 연계시켜 놓은 만큼 이제 북핵문제가 호전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적극적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먼저 움직여 남북관계 개선을 시도하기가 영 멋쩍은 모양이다. 최근 기자회견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북핵 진전에 맞춰 보다 적극적이고 유연한 대북접근을 아직 고민하지 않는 모습이다. 여전히 북한의 선변화를 촉구하면서 북이 먼저 움직이길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북이 먼저 태도를 바꿔 움직일 가능성은 없다. 어렵게 꼬인 지금의 남북관계는 북핵진전 상황을 이유로 한국 정부가 먼저 움직여서 대화의 물꼬를 트고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말만 할게 아니라 실제로 북에 대해 대화를 공식 제의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대북지원을 공식 결정해야 한다. 북이 먼저 지원을 요구하라고 트집 잡을 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대북지원을 위한 당국간 회담을 제안해야 한다.
다행히 핵문제가 호전되는 데도 이번 기회를 잡지 못하고 예의 원칙과 명분에 매달려 남북관계 개선의 호기를 놓친다면 이명박 정부는 상당기간 소모적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는 결코 실용정부가 아니다. 외교안보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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