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인도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막스 뮐러는 모든 유럽어의 모어인 라틴어와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끄리뜨가 동일한 어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을 아리야(Arya; 고귀한)인이라고 하면서 동일한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사실 아리야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어족일 뿐 그 안에 있는 여러 인종을 같은 종족으로 볼 수는 없는데도 당시의 초기 학자들은 그 아리야인을 모두 동일한 종족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고대 인도 문화와 자신들의 고대 문화 사이에 뭔가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 초기 학자들은 그 아리야인이 인도아대륙으로 건너와 원주민을 제압하고, 노예화하여 점차 그 선진 문화를 이 땅에 보급하면서 살아왔고, 그들의 유산이 바로 베다(Vada) 문학이고 산스끄리뜨 문학이며, 브라만이야말로 순수 아리야 혈통을 보존한 귀한 지식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인도 고대 문화는 선진 유럽 문화에서 떨어져 나가 잃어버린 한 쪽 날개로 간주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이들 동양학자들은 당시의 유럽 문화에서 찾을 수 없는 전혀 새롭고 높은 가치의 문화를 인도의 고대 문화에서 찾아내었다. 막스 뮐러는 유럽의 고대 문화가 능동적이고 호전적이며 탐욕적인 데 비해 인도의 고대 문화는 수동적이고 명상적이고 목가적이라 하면서 그 본질은 항상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높이 치켜세웠다. 그는 인도의 과거가 수천 년 동안 이러한 성향을 지닌 채 그 전통이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고 했다. 이런 평가는 사실 그렇게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야 했음에도 당시 인도인들이 그런 평가에 만족했던 것은 그 힘 센 자들에 대한 비굴한 경외심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다. 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 우리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소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송광사 선방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는 일부 선교사와 외국인이 역사가 정체되어 있고 문화가 신비하다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채색한 왜곡된 이미지에 한국인 스스로가 물들어버린 결과다. 그 정체된 오리엔탈리즘에 스스로 뿌듯해 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인도와 많이 닮았다. 엄밀하게 볼 때 한국 사회는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한경쟁적인 사회다. 이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쉽게 알고 있다. 어디를 봐서 한국 사회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인가?
한국인 스스로 빠져 들어 있는 오리엔탈리즘이 힘의 논리와 섞이면서 때로는 참으로 괴이한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푸른 눈의 외국인이 한국 불교의 참선에 매료되어 한국 땅을 밟는 일이 간혹 있다. 그걸 가지고 좋네 나쁘네 하고 평가를 내릴 일은 아니다, 그 사람들의 세계관에 따른 본인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그 경우에까지도 그 사람의 학력이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치켜세우는 사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힘과 승리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참선을 하러 온 사람이 하버드 출신이면 호들갑을 떨지만, 부랑아 출신이라면 누가 받아주기라도 했을까? 한국인의 학력 콤플렉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꼴이 참 우습다.
사실 한국인의 인종 차별이 악명 높은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흑인을 차별하고 백인을 숭모한다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사실은 흑인 가운데서도 돈 많고 영어 잘 하는 미국에서 온 흑인에게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고,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은 사람 취급도 안 해 주는 걸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인종 차별이 아니다. 오로지 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힘의 이데올로기가 돈과 결합하면서 매우 변태적인 파시즘의 형태와 위력을 보인 것이다.
동양학자들은 인도를 연구하면서 애써 그들 이론에 맞는 즉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브라만 전통의 사료만을 수집했다. 그리고 인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불교, 자이나교 혹은 비(非)브라만 전통의 물질론에 입각한 자료는 일부러 무시하였다. 그리고 식민 지배자들과 궤를 같이 하는 일련의 공리주의 학자들은 피식민지의 법률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었다. 피식민지 인도의 법률은 전통적으로 브라만이 만든 관습법이었고, 그 안에는 관습, 풍속, 의례, 신화 등이 모두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동양학자들은 브라만 전통에 입각한 카스트의 구조를 설파하는 법전과 경전만을 주로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인도는 그 어떤 다른 사회보다 그 문화의 성격이 훨씬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관을 놓고 볼 때도 세상 포기 혹은 초월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신앙이 있는 반면 세상 중심의 물질 숭배 혹은 기복 신앙도 매우 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볼 때도 브라만의 카스트 사회론도 있지만 그에 반발하는 카스트 무용론도 있고 실제로 그 움직임도 매우 활발하다. 그것이 관습에 관해 당위적인 모습을 보이는지, 실재의 모습을 보이는지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카스트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사회에서 브라만의 힘이 가장 강력한 데다가, 그 권력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학자들이 접할 수 있는 자료는 대부분이 그 브라만 중심의 세계관 즉, 초월 중심이나 카스트 구조와 관습법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실재한 사회의 갈등이 브라만적 사료를 통해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러한 갈등은 브라만적 사료에도 은밀히 담겨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경전을 통해 말세의 조짐을 한탄하거나 저주 혹은 경고하고 있고, 이 맥락의 행간을 읽어내면 그러한 갈등을 포착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 갈등이 신화나 법전 속에서 현세의 현상이 아닌 우주적 현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처음 이를 접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간파하기가 어렵다. 결국 브라만 세계관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자료의 행간을 읽어내는 일에 실패한다면, 인도 고대는 수동적이고, 목가적이고, 명상적이고, 초월적이고, 카스트에 고착된 채 한 점 변화 없이 내려온 - 그것이 이상향이든 아니든 -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고대 인도를 초기 동양학자들이 본 것과 같이 항상 이상향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옥스포드 인도사》를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 인도의 역사를 처음 기술한 제임스 밀에게 있어서 인도의 문화는 결코 그 동양학자들의 눈에 비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기 동양학자들과는 달리 인도의 문화를 저주하였고 야만스럽게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식민 지배 당시의 인도는 말할 것도 없었고, 고대 인도의 문화 즉 인도인의 종교 체제, 정부 형태, 법률 제도,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이 야만적이었다.
단지 초기 동양학자와 제임스 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인도 사회가 수천 년 동안 그 본질이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이다. 동양학자들이 인도사회를 목가적인 눈으로 보고 순수 형태로서 그것이 보존되어 내려왔다고 본 반면에, 제임스 밀을 비롯한 공리주의 사학자들은 인도 사회는 강력한 전제 군주 아래에서 사회가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동양사회 정체론이다. 그래서 제임스 밀을 비롯한 공리주의 사학자들은 19세기 당시 인도를 매우 후진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기준 즉 합리성을 인도 문화가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임스 밀이 인도 문화를 이렇게 평가한 것은 결국 오로지 영국의 합법적 통치만이 인도 사회를 진보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제임스 밀은 당시 인도를 방문하고 온 사람들의 기행문에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많이 찾았다. 이 점에서는 마르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혹은 그와 유사한 계몽주의 사상에 물들어 인도 땅을 밟은 당시의 유럽인에게 인도는 자신들이 최근 이룩해 놓은 문명의 세례를 전혀 받지 못한 야만의 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인도에서 당시 그들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사유지, 민주주의, 입법 등의 개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도의 문화는 야만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행객은 철저히 자기 주관을 가지고 관찰자적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상을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그 여행기는 이미 동양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인도에 함몰되어 있던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라 그 안의 인도는 결국 동양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도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남긴 여행 스케치를 자료로 삼아 내 놓은 역사서 또한 실재하는 인도의 역사가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도 인도를 연구하는 학자의 영향력보다는 대중에게 영향력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 혹은 여행객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 이 시대의 스승 가운데 한 분이신 법정 스님이 그렇고, 여론 매체에 막강한 힘을 가지면서 불교에 대해서 해박한 - 불교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서 인도를 잘 안다고 볼 수는 없다. - 도올 김용옥이나 뛰어난 마술적 언어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시인 류시화가 그렇다. 그들이 보는 인도는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혹은 브라만 문헌이나 불교 경전에 나오는 혹은 유럽의 동양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도로부터,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는 사이에, 영향을 받아 그린 인도거나 시인의 마음으로 보는 인도 혹은 경전 속에 있는 인도다.
이 점에서 특히 시인 류시화의 문제는 심각하다. 대상이 개든, 걸인이든, 성자든, 여관 주인이든, 뱃사공이든, 그 사람이 힌디어를 쓰든, 따밀어를 쓰든 벵갈어를 쓰든 시인이 누구하곤들 대화를 못 나누고, 무슨 말이든 못 알아먹겠는가? 글쓴이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곳을 '하늘 호수'라고 규정하면 모든 왜곡과 편견에서 양해를 받을 수 있지만, 독자들은 그 시인의 말로 인해 그곳을 실제로 존재하는 인도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인도에 사업을 하러 나가는 기업인이 그 책을 인도 안내서로 가지고 가는 일마저 발생한다. 이 정도면 할 말 다 한 것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내는 세상이 이 뿐이 아니니, 그리 애달파 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역사란 인간의 삶을 언어로 옮겨놓은 것인 만큼 그 언어 기술 안에 주체의 시각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기술해 놓은 역사를 읽어내는 일에 있어서도 그 주체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전이나 경전만을 보면 고대 인도는 아시아적 정체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브라만이 만든 사료를 낭만주의와 식민주의에 물든 유럽의 동양학자들이 읽고 만든 가상의 모습이다.
그러한 유럽의 전통은 비단 식민주의자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고, 마르크스나 그 이후 좌파 학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제국주의를 철저히 비난하였지만 영국의 도래만이 인도의 전제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후 많은 좌파 연구자들이 그를 답습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영국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한 한 결과를 가져 왔다. 그들 모두가 유럽 중심 오리엔탈리즘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만들어 놓은 유럽 중심 오리엔탈리즘의 논리는 이제 한국으로 들어 와 한국 중심 오리엔탈리즘이 되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물건 사러 오는 것처럼 베트남에 와요. 사실 기사만 문제가 아니지요. 베트남 '처녀'와 국제 결혼을 하는 방식의 문제가 더 근본적이에요. 한국 남성은 왕자고 베트남 여성은 신데렐라인가요?" 2006년 4월, 한국 사회를 부끄럽게 만든 《조선일보》의 베트남 결혼 중개업 르포로 인해 '우리' 중심의 인종주의 사건에 대해 베트남 유학생들이 던진 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은 매매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국인 남성은 수십 명의 여성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어항 속에서 물고기 고르듯 고른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조선일보》는 중계방송 하듯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 기사 제목으로 "한국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 주오"로 달렸다. 이러한 사실이 베트남인에게 얼마나 모욕적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신문은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 진보를 위해 영국이 지배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난한 베트남 '처녀'를 위해 부자 한국 남성과 결혼해야 한다는 논리로 되었다. 한국이 강대국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주 노동자 친구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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