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지금도 은행을 금융기업이라고 하지 않고 금융기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금융위원회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이런 풍토에 대해 강하게 질타했다.
"우리 국민이나 공직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금융산업을 금융기관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금융기업들이 정부기관이 권력기관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관치금융에 의해서 우리 금융이 낙후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금융기관이라면 철저한 담보평가를 해야 하는데, 금융기업들이 권력에 의해 철저한 관치를 받았기 때문에 부실한 금융기관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많은 국가적 손실을 입힌 것도 사실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금융기관' 질타한 이유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관치금융의 전위대로 활약한 산업은행을 지목해 "지금도 산업은행장 명칭을 총재라고 하지 않나요? 스스로 총재라고 하며 은행장 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요?"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 비난을 받아서인지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금융공기업 수장으로는 처음으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지금 세계적으로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할 금융기업들이 있다. 바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다. 이들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신용평가로 일개 기업은 물론 한 나라의 생사를 좌우할 가공할 시장권력으로 군림하면서 '기관'으로 불려왔다.
금융기업이 명예로운 의미에서 '기관'이라고 불리려면 관치에 휘둘리거나, 돈벌이에만 급급한 장사꾼으로 전락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국제신용평가기관들 스스로가 지난 96년 이후 스스로를 '서비스업종'이라면서 돈벌이에 급급했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나고 있다.
월가의 투자자들을 대변해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비리를 집중 취재해 왔던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최근 세계 최대 신용평가기관 무디스의 사례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사실들을 폭로했다.(☞관련 기사:"미국발 모기지 부실사태, 세계3대 신용평가기관이 원흉" )
'평가 장사'에 치중한 세계 최대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라면 지난 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의 국채 신용등급을 한꺼번에 6등급 강등시켜 우리나라를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전락시킨 악연이 있다. 당시에도 무디스의 이런 행태의 배경을 두고 일부러 신용등급 재평가를 늦춰 한국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음모론이 무성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동안 무디스가 지난해 초부터 미국 등 전세계 금융기업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힌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배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헤쳤다.
이 신문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무디스는 신용평가 시장 점유 확대를 위해 뉴욕 월가 은행들과 쌓은 친분을 바탕으로 이들이 발행하는 채권등급을 과대평가해 글로벌 금융시장 부실을 키웠다.
무디스는 주택시장 붐이 형성되던 1990년대 말부터 CDO(대출채권·회사채 등을 한데 모아서 담보로 발행하는 부채담보부증권) 등에 미국 국채에 부여되는 'AAA' 라는 최고 등급을 부여하는 '신용평가 장사'로 영업이익을 늘렸다는 것이다.
WSJ는 "실제로 무디스의 시장 점유율은 이처럼 철저한 장사꾼식 사업에 힘입어 1999년 14%에서 2년 만에 64%로 뛰었다"고 지적했다.
무디스의 급성장을 주도한 인물은 브라이언 클락슨 회장이다. 1999년부터 클락슨 회장은 무디스와 함께 '세계 3대 국제신용평가기관'으로 불리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사와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시장친화적 경영방식'을 전격 도입했다.
"신용등급 남발 거부한 애널리스트는 해고"
심지어 그는 신용등급을 엉터리로 매길 수 없다며 반발한 마크 아델슨 당시 수석 애널리스트를 해고하기도 했다.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애널리스트 교체를 요구한 은행들은 크레디트스위스와 UBS, 골드만삭스 등이었다.
무디스 전 임원이었던 폴 스티븐슨은 "신용등급 평가과정이 협상으로 변질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CDO는 '신용평가 협상'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대상으로 바로 오늘날 미국 경제를 비롯한 글로벌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을 포함해 흔히 '구조화 금융'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파생금융상품이다.
이른바 클락슨 회장이 진두지휘한 '구조화 금융사업' 부문의 순익은 2006년 무디스 전체 순익의 약 43%를 차지했다. 이는 지난 1998년 28%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클락슨 회장이 신용평가업무가 '서비스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고객들의 전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응하라"고 직접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영업에 나서면서 이처럼 괄목한 '실적'을 올렸지만, 이제는 이 업체의 존립 근거를 뒤흔드는 위기를 자초한 결과를 낳고 있다.
지난해 8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무디스 등 3대 국제신용평가업체들이 투자은행 등 채권발행기업들과의 유착에 따른 신용평가로 서브프라임 사태를 초래한 것으로 보고 법적 대응을 위한 조치에 나선 데 이어, 미국의
의회와 증권거래위원회(SEC), 오하이오 검찰총장 등 주 사법당국까지 나서 무디스 등 신용평가업체들을 기소하기 위해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글로벌 금융시장 규제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SEC에 의해 국가공인통계평가기관(NRSRO)으로 지정된 영광의 '3대 신용평가기관' 중 적어도 무디스는 WSJ의 보도와 EU집행위원회 등이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만으로도 이미 '제명' 조치를 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게 많은 투자자들의 인식이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투자자들의 책임은?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철저한 신용평가로 이익을 보는 당사자들은 투자자인데, 정작 수수료는 채권발행자인 기업들이 내고 있는 아이러니한 시장 상황에서 '철저하게 신용을 평가하는 '기관'이 과연 존립할 수 있을까?
WSJ도 "신용평가업체들이 신용평가 수수료를 투자자가 아닌 채권발행자인 기업에게서 받고 있고, 기업에 대한 각종 컨설팅 서비스 등도 제공하고 있어 근본적으로 이해상충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특히 CDO 등 파생상품의 경우 일반 회사채보다 2배나 높은 수수료를 받는 점에서 이런 상품의 신용평가등급을 후하게 매기며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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