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적어도 인도에서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 인식이 있었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 사상가에게 과거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즉 실제로 어떠한 모습이었는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를 '그리 하였을 것 같은 것' (이띠하사 itihasa)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몰가치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것이 과거와 어떠한 인과 관계가 있는지는 고민의 주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파악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실재하는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가 아니고 어떤 절대적인 우주 법에 의해서 우주의 질서가 이 사회 안에서 운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아니 하였다.
따라서 정치 권력이 특정 영역을 통치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통치 방식은 반드시 그 절대적인 우주법 위에서 해야 했다. 그 절대적 우주법은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이자, 의무이고 동시에 그것이 진리였으니 그것이 어떻게 지켜지지 않는지에 대해선 기록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진리를 따르고 지키는 것을 제외한 모든 현실의 세계에 대해서 그들은 별 가치를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치 권력자가 동아시아와 유럽에서와 같이 어떠한 뜻을 가지고 나라 이름을 세운다거나 연호를 세워 새 기원으로 삼는다거나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러한 역사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 브라만 사상가들에게 그 절대적 진리란 무엇이었는가? 흔히 생각하듯, 탈물질적이고,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성찰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물질적이었고, 사회적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모든 관심과 가치를 사회 질서에 두었던 것이다. 이른바 카스트 체계를 중심으로 둔 사회 질서다. 그들의 카스트 질서를 향한 일념은 결국 브라만 최고주의와 제사 절대주의였다. 브라만 이하 모든 카스트는 반드시 우주 법을 형상화한 제사에 물질을 바쳐야 하고, 그 제사는 브라만만이 관장하니 그 물질은 고스란히 브라만 몫일 수밖에 없다. 왕 또한 이 제사를 지내는 행렬에 동참해야 하고, 제사를 통해 사원에 물질을 헌납해야 한다. 그러면 브라만의 축복과 신화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브라만이 국가나 민족을 유한한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유한한 것은 어떠한 권위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그래서 그와 관련된 왕조의 유래나 계보 등은 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고대 인도의 역사에서 어떤 당위적 행위를 한 주인공이 실제로는 인간이지만 선인(仙人)이나 신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와 관련해서이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에서 사회 질서의 모본이라 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 가운데 하나인, 《마누법전》은 마누가 편찬한 법전이 아니고, 마누라고 하는 선인이 내려 준 (말씀을 누군가가 편찬한) 법전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을 실제로 들었는지, 들었다면 누가 들었는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실은 그 법을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서 만들어냈겠지만, 고대 인도의 맥락에서는 그 법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경전이나 법전의 저자 혹은 편찬자가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가 모두 신화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신화로 표현되고 그 신화에 나타난 행위는 사실 여부보다는 당위성의 의미를 가지면서 규범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재하는 역사가 무의미하고, 그것이 갖는 신화만이 의미를 갖는 것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비일비재하였다. 그 유명한 아홉 살의 이승복 어린이가 실제로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는지 아니면 조작되었는지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된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가 아홉 살 난 이승복이든, 아흔 살의 홍길동 할아버지든 그 사실 자체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보다는 그 이야기가 향하는 그래서 의도하는 사회 규정이자 그 이념만이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하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조선일보> 기자가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는지 아니면 서울에서 작문을 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삼아서는 아니 되었다. 그 영원회귀의 신화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일 뿐이었다.
역사를 신화로 만드는 역할은 5공화국 전두환 시절에 특히 활발하였다. 그리고 그 활발한 신화 만들기의 중심에 대학의 교수가 있었다. 교수들은 난국에 처해 있는 이 때 인권은 잠시 유보하여 국가에 맡기고, 국가를 중심으로 일심단합 해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것이 대학생의 본분임을 가르치도록 종용 당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수는 이러한 신화 조작의 작업에 기꺼이 혹은 물질의 노예로서 동참하였다. 정부에게는 데모하는 대학생이 가장 큰 골치 덩어리였지만, 그 대학생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교수였으며, 그 교수를 통제하는 자는 재단이었고, 그 재단은 돈에 굶주려 있어 그 배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정부였다. 그래서 군사 정부는 대학생 인원을 대폭 늘려 대학 재단에게 돈 보따리를 안겨 주었고, 재단은 다시 그 교수들에게 돈 보따리를 풀어 주면서 충성스러운 애국 어용 학생을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고대 인도 사회에서의 사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여야 했고, 마땅히 가야 할 영원불멸의 원초적 신화에만 뜻을 두는 사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고대 인도가 정치적 권력 구조나 경제적 실생활의 모습 혹은 카스트 구조의 변화 등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들의 관심이 실제보다는 당위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브라만은 모름지기 이러이러 해야 하고 끄샤뜨리야는 저러저러, 바이샤는 또 이러이러 해야 하며 슈드라는 이런저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둔 가장 큰 관심은 그 카스트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였고, 그 차원에서 맨 아래 계급인 슈드라가 절대적 보편법을 관장하는 브라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중죄로 다스려야 했다.
예를 들어, 《마누법전》에는 '브라만에게 그 다르마를 거만하게 가르치려 드는 자에게는 왕이 그 입과 귀에 뜨거운 기름을 붓게 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만큼 브라만이 카스트의 사회 질서를 지키고자 심혈을 기울였고, 그 일에 왕이 적극 동참했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슈드라의 브라만 중심의 권력 구조에 대해 상당한 반발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강력한 제재 조치가 법전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너무나 많은 슈드라의 반발이 있었고, 그 반발로 인해 사회 갈등이 첨예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 사상가가 그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당시의 세계관을 지배했다고는 하나 실제 역사가 전적으로 법전이나 경전에 표현된 것과 같은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법전이 발달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당위성의 역사가 실재하는 역사가 되지 못하였다는, 즉 실제 사회에서는 그러한 당위성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과 그러한 당위성을 지키려는 세력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왕이 브라만 중심의 당위성의 체제를 즉 카스트 체제를 부인하거나 그것을 개혁하려는 갖가지 행위를 할라치면 그는 브라만의 엄청난 공세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고대 인도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다양한 악마가 항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불경한 행동을 하거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야만적인 행동을 하여 참다못해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악마를 심판한다는 신화의 구조는 바로 그 땅에서 브라만적 질서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로 해석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신화를 가지고 구체적인 역사 재구성 작업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을 항상 기억하는 - 인도에서는 신성한 이야기는 원래 기록하지 않고 구전으로 전한다 - 것이 브라만만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역사적 실체를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 사회에서 정치 권력이 의례적 권위보다 막강한 힘을 갖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자연의 이치다. 인도 또한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 브라만이 - 중세 유럽에서와 같이 교단의 조직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 왕보다 더 강한 권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마찬가지 논리로 실제 권력은 항상 브라만이 가지고 있는 의례 권위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따라서 고대 인도에서 '모든 왕은 끄샤뜨리야'라는 사실은 끄샤뜨리야만이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써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무력으로 권력을 잡는 자는 그 출신이 어떠하든지 간에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왕이 된 이후에 그들은 모두 끄샤뜨리야로 족보를 고칠 수밖에 없었음을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경우 브라만에게 왕은 그 대가로 많은 토지와 재물을 하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인도사의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인 법전은 당위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해석은 고대 인도의 역사 인식 즉 브라만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법전이라고 해서 중국이나 다른 문화권에서의 그것처럼 해석하여 그것을 사료로 이용하면 고대 인도는 사회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정체된 사회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인도 사회를 그렇게 본 것은 바로 그가 고대 인도인의 역사 인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법전이나 경전을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인도 사회 정체론이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였다고 한다면 그건 과연 역설적이기만 한 것일까? 자신이 살아 온 사회에서 형성된 역사의 인식 위에서 다른 문화권의 사료를 편협하게 이해함으로써 인도의 역사는 씻을 수 없는 왜곡의 덫에 빠져 들었고, 결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역사 인식의 일방적 해석을 하는 것이 인류사에 큰 죄를 짓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는 무서운 교훈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브라만의 역사가 인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규정해 놓은 권위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한 노무현은 인도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악마와 같이 규정되었다. 그리고 그 악마를 규정하는 조중동은 브라만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조중동이 또 다른 '브라만'인 일부 종교 권력과 결탁하여 그 '악마'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모습 또한 고대 인도에서 보던 그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가장 닮은 것은 그 '악마'에 대해 조중동과 종교 권력이 무차별 공격을 가할 때 그 가진 자의 보편적 신화를 분별하지 못하고 함몰된 채 같이 욕하고, 핍박하는, 그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매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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