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는 상대가 있다. 대북 정책의 상대는 바로 북한이다. 우리의 대북 정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는 기실 대북 정책의 직접적 당사자인 북한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이 우리의 대북 정책에 호응하면, 그 정책은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을 것이나, 거부하면 소기의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 정책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책의 대상이 되는 북한이 이를 수용해야 한다.
하나 더. 어떤 정책이라도 바뀔 수 있다. 정책이 지향한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달성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정권에 따라 얼마든지 그 기조를 달리할 수 있다. 대북 정책을 포함한 대외 정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결과로 만든 상대와의 합의, 특히 그것이 국제간에 이루어진 합의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합의는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는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합의가 정책의 변화로 아예 없던 것이 될 수는 없다. 만약 합의를 없던 것으로 만들려면 그에 상응하는 해명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상대가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우리 대북 정책의 대상인 북한도 이의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
새 정부 대북 정책의 핵심이자 대선 과정에서 선보였던 비핵·개방·3000. 정권이 출범하고 통일부가 존치된 후, 대북 정책이 과연 어떤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지난 3월 26일 통일부 대통령 업무보고는 새 정부 대북 정책 방향과 내용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업무보고에는 지난 정권이 북한과 맺었던 합의사항, 특히 작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이 합의한 10·4 정상선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새 정부는 북한과 만나 비핵·개방·3000 구상에 대한 설명은 하려고 하면서도, 과거 정부와 북한이 사업추진을 위해 주고받은 결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통일부 업무보고는 기존의 대북 정책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시각을 철저히 수용·반영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는 보여진다. 그래서인지 북한에 대해 요구하는 사항들은 많았다. 3통문제의 우선 해결이 그렇고, 이산가족 상시상봉 체계 구축이나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해결, 북한 인권 개선 문제도 그렇다. 그리고 그 나머지 남북한 경제협력은 북한이 우리의 계획을 그대로 수용할 것이라는 희망적이며 묵시적 기대에 근거했다. 남북상사중재위원회 가동이 그러하며, 투자보장합의서 이행이나 안정적 농산물 생산을 위한 계약재배, 북한의 자연자원 개발이 그렇다. 나들섬 구상이 북한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 또한 그와 같은 각도에서 해석 가능하다.
3통 문제의 해결, 이산가족 상시상봉,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해결, 상사중재위원회 가동을 포함, 농업분야에서의 협력이나 북한 자연자원 개발 등 할 것 없이 이와 같은 협력 사안들은 모두 과거 정권에서도 추진·실천하려고 했던 사안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왜 그와 같은 사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에 대한 분석과 이를 감안한 정책 추진일 것이다.
정부가 대북 정책 추진에 있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왜 10·4 정상선언에서의 남북합의를 지킬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과 북한의 동의를 구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정책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차원에서도, 또 새롭게 추진할 우리 정책에 대한 북한의 수용을 촉구하기 위해서도 요구된다. 10·4 선언을 지킬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그와 같은 선언을 했던 과거 정권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선언을 지지했던 남한의 국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과거 정권을 담당했던 사람이나 합의를 지지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새 정부가 섬기겠다는 국민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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